[일본 제대로 알기] 지폐 주인공 3인···사상가·여류작가·의사

[아시아엔=심형철 <아시아엔> 칼럼니스트] 일본은 선진국 중에서 유독 현금 결제를 선호하는 나라다. 약간 오래된 통계지만 2016년 지급 수단별 사용 비중을 보면 현금이 81.2%, 카드가 15.8%를 차지했다. 우리나라는 같은해 현금 사용 26%, 카드는 66.2%였다.

지폐 4종과 동전 6종, 총 10종의 화폐가 일본 열도에서 동분서주하고 있는 셈이다. 일본 화폐의 모델은 학교 교과서에 나올 정도로 지명도가 높으면서 국민에게 존경받는 인물을 선정하고 있다. 또 위조방지를 위해 되도록 정밀한 사진이나 초상화를 구할 수 있는 인물을 고른다. 그렇다면 2019년 현재 일본 화폐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일까?

10000엔권
  1. 10000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후쿠자와 유키치(1835.1.10~1901.2.3)는 일본의 계몽사상가, 교육자, 게이오의숙대학(慶應義塾大學) 창립자다. 일본 정부는 2004년 새 지폐를 발행했는데 이때 유일하게 바뀌지 않은 주인공이 바로 10000엔권 주인공 후쿠자와 유키치다. 1984년부터 쭉 최고액 지폐의 주인공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에도시대에 하급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런데 당시에는 신분제도가 있어서 아무리 능력이 출중해도 아버지가 하급무사면 자식도 하급무사가 되어야 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펼쳐 보이려고 노력했다. 우선 나가사키(長崎), 오사카(大阪)에 가서 당시 교역 중이던 네덜란드의 언어와 난학(蘭學, 네덜란드의 학문. 의학과 천문학 중심)을 공부했다. 물론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뒀고 후에 에도에서 서양 학문을 연구하는 사설학교 ‘랑가쿠쥬쿠’(蘭学塾, 난학숙)를 열게 됐다. 이게 바로 게이오대학의 전신이다.

1858년 막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개항을 하게 된다. 일본이 드디어 근대화의 길로 들어서게 된 거다. 미국, 영국 등과 교류하는데 필요한 세계 공용어가 영어인 것을 깨달은 후쿠자와 유키치는 발 빠르게 독학으로 영어를 공부했다. 기회는 준비된 자의 것이라고, 막부에서 미국에 사절단을 보낼 때 영어가 가능한 후쿠자와 유키치도 선발되었다.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도 파견되었던 유키치는 도중에 들렀던 홍콩에서 서양 제국주의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일본의 앞날을 걱정하게 된다. 이후로도 서양 여러 나라를 여행한 그는 『서양사정(西洋事情』(1866년)이라는 책을 써서 새로운 문물을 일본에 소개하기도 했다. 이 책의 내용은 1868년 메이지 정부의 정책에도 반영되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았고, 사람 아래 사람을 만들지 않았다”는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학문의 권유(学問のすすめ)』(1872년)라는 책도 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한데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학문을 했는가 안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는 거다.

이렇듯 일본 국민계몽에 힘쓰던 후쿠자와 유키치가 우리나라 갑신정변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그런데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후쿠자와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했다.

  1. 5000엔 히구치 이치요(樋口一葉)

히구치 이치요(1872.5.2~1896.11.23)는 2004년 새 지폐 발행 때 새롭게 등장한 모델로, 일본 여성 최초로 원고료를 받아 생활한 직업 작가다. 어려서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고, 수석 졸업을 할 정도로 성적도 좋았지만 여자는 학업보다 가사일이 중요하다는 어머니 반대로 초등학교 정도를 마친 후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러나 아버지 덕분에 와카(和歌, 일본 고유의 시) 학원인 ‘하기노야’(萩の舍)에 들어가 문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런데 10대 때 큰 오빠와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치요는 집안의 가장이 되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치요는 경제적 어려움에 생계형 소설을 쓰기로 결심했다. 친구 소개로 신문기자이자 작가였던 나카라이 토스이 (半井桃水)를 찾아가 글쓰기를 배웠다. 그리고 나카라이 토스이는 자신이 창간한 <무사시노>(武蔵野)라는 잡지에 20세의 히구치 이치요를 작가로 데뷔시켰다.

히구치 이치요라는 이름은 그때부터 사용한 필명 중 하나다. 본명은 히구치 나츠(樋口奈津). 그런데 토스이와 이치요의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치요가 토스이의 집을 드나든다고 두 사람의 만남에 좋지 않은 소문이 돌았던 때문이다.

이치요는 생활고로 계속 글을 썼다. 작가로도 이름을 알렸지만 원고료로는 생활이 여의치 않아 잡화점을 열었지만 장사가 잘 안돼 1년 후에 접었다. 이런 최악의 경험이 밑거름이 돼서 1894년에 쓴 작품 『오츠고모리(大つごもり, 섣달 그믐날)』부터 미완성 작품인 『우라무라사키(裏紫, 해질 무렵 무라사키)』까지 14개월 동안 명작을 계속 발표했다.

오츠고모리를 비롯해 『다케쿠라 베(たけくらべ, 키 재기)』, 『니고리에(にごりえ, 탁류)』 등이 발표된 이 기간을 가리켜 ‘기적의 14개월’이라고 할 정도다. 작품이 호평을 받아 이름도 떨치게 됐는데 이치요는 안타깝게도 이즈음 결핵 진단을 받았다. 당시 결핵은 거의 불치병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 죽을 힘을 다해 글을 쓴 히구치 이치요는 24년이라는 짧은 생이었지만 근대 문학사에 남을 명작들을 남겨 사후에 큰 명성을 얻었다. 5000엔권에 등장하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돈이 없어 가난했던 이치요, 자신이 지폐 주인공이 된 줄 안다면 기뻐할까?

  1. 1000엔 노구치 히데요(野口英世)

노구치 히데요(1876.11.9~1928.5.21)는 세균학자. ‘닥터 노구치’라는 만화의 실제 모델이 바로 노구치 히데요다. 노구치 히데요도 히구치 이치요처럼 2004년 일본 지폐 모델로 선정됐다.

일본의 슈바이처 혹은 일본의 파스퇴르라고도 불리는 과학자다. 노구치는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는데, 1살 때 화로에 왼손 화상을 입어 손가락이 붙는 장애가 생겼다. 다행히 선생님, 친구 등 주변의 도움으로 수술을 받아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노구치는 의사라는 꿈을 이루지만, 특히 병의 원인 등을 연구하는 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노구치는 독사의 독부터 진행성 마비, 각종 세균성 질환에 대해 연구했다. 노벨상 후보에 몇 번 올랐지만 수상은 못했다. 아프리카에서 황열병 연구 중 감염되어 51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노구치가 세상을 뜬 후 그의 연구 성과라고 알려졌던 일부가 잘못된 것으로 밝혀지고, 그의 생애가 미화된 면이 많다는 말들도 있다. 하지만 사람들이 ‘히데요는 언제 자 나?’ 궁금해할 정도로 밤낮으로 연구에 매진한 열정과 장애 및 가난을 딛고 성공했다는 것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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