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역사속 오늘] 미켈란젤로와 다빈치의 르네상스, 그리고 아더왕의 ‘엑스칼리버’

아더왕 이야기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지난 6월 20일 아내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미술사가 전원경 박사의 ‘르네상스: 꽃의 도시에 찾아온 봄’이란 제목의 미술사 연구강좌를 두 시간 수강했다. 강의 후 박물관 인근 맛집 ‘갯마을’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는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서울YWCA 창립97주년 특별행사로 마련한 뮤지컬 <엑스칼리버>를 관람했다.

르네상스는 부활, 재생이란 뜻의 프랑서語이며, 그리스·로마의 문화 전통이 다시 살아났다는 의미에서 사용되는 용어다. 14-16세기에 서유럽 문명사에 나타난 문화운동인 ‘르네상스’는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이 성장하고 번영을 누린 14세기부터 사회인들의 욕구는 점차 다양해졌다. 상업을 위해 기초적 계산을 할 줄 알아야 했고, 라틴어를 비롯한 여러 외국어를 구사하는 능력도 필수였으며, 과학 철학 예술에 대한 이해력도 중시되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는 미술뿐만 아니라 과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인 르네상스적인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사람과 동물의 해부도를 평생 동안 그렸으며, “화가는 해부학(解剖學)에 무지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채식주의자였다. 부유층들이 기름진 음식과 진수성찬을 먹던 시절, 그는 샐러드, 과일, 채소, 면 등을 즐겨 먹었다.

이탈리아의 천재 예술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화(fresco painting)가 복원된 후, 로마의 교황청이 공식적으로 대중들에게 이 작품을 공개한 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인간의 몸으로 이루어진 신학의 거룩한 성소”라고 말했다. 당시 뵈첼리와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참여하여 프레스코화를 그렸고, 미켈란젤로는 성당의 천장화와 벽화를 그렸다.

천재의 원형으로 알려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신성의 반열에 오른 미켈란젤로가 예술적 결투을 벌인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두 화가는 1504년 피렌체 정부의 대회의장을 꾸미는 대규모 벽화 프로젝트에서 높이 10미터, 폭 2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벽면 2개에 한쪽 면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그리고 다른 한쪽 면은 미켈란젤로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애석하게 프로젝트는 최종 순간에 취소되어 세기의 대결은 무산되었다.

그리스 로마의 조각에 깊이 심취한 미켈란젤로는 다빈치가 탐닉했던 자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는 ‘최후의 심판’과 만년의 대작 프레스코화 ‘사울의 개종’ 등에서 고의로 원근법(遠近法)을 무시했으며, 그 어떤 회화에서도 자연의 모습을 묘사하지 않았다. 이는 라이벌 다 빈치를 무시하기 위한 의도였을지도 모른다.

엑스칼리버

뮤지컬 <엑스칼리버(Xcalibur)>는 색슨족의 침략에 맞서 혼란스러운 6세기 고대 영국을 지켜낸 신화 속 영웅 아더(Arthur)王의 이야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아더왕의 전설은 서양 판타지 문학의 성립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전설이며, 켈트족에 속하는 영웅의 이야기이다. 아더왕의 이야기는 독일과 유럽전역에서 큰 인기를 끌었으며 후에 토마스 맬러리에 의해 아더왕의 죽음(1485)으로 집대성되었다.

<엑스칼리버>는 평범했던 한 사람이 빛나는 제왕(帝王)으로 거듭나는 여정을 통해 감동과 신선한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선사했다. 그는 왕이 되는 과정에서 王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보검(寶劍) ‘엑스칼리버’를 얻게 되고, 즉위 후 많은 나라를 정복했다. 다양한 장르의 마법 같은 음악과 국내 최대 규모의 70여 명이 동시에 등장하는 아더왕과 색슨족의 전투는 블록버스터급 무대를 연출했다. 아더왕 역에 카이(Kai)가 열연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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