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과 자살①] ‘즐거운 사라’ 마광수와 ‘서시’ 윤동주의 특별한 인연
[아시아엔=박명윤 <아시아엔> ‘보건영양’ 논설위원, 한국보건영양연구소 이사장] 마광수(馬光洙) 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우울증(憂鬱症)으로 9월 5일 자택에서 자살했다. 향년 66. 고인은 아파트 베란다에서 스카프로 목맨 채 숨져 있었으며, 주변에서 “내 시신 처리와 재산 양도를 누나에게 맡긴다”는 내용이 담긴 친필 유서가 발견됐다.
마광수는 시인으로 그리고 작가로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첫 시집 <광마집>(1980)의 결론은 사랑이었으며, 26년 전 소설 <즐거운 사라>는 도발적 성애(性愛)를 다룬 음란물로 몰려 금서가 됐다. 1991년 첫 출간된 ‘즐거운 사라’(서울문화사)는 아직 출판금지 상태이며, 마광수 사망 후 이 소설(정가 5800원)은 중고 판매 사이트에서 한권에 25만원에 팔리고 있다.
마광수는 1951년 1·4후퇴 당시 피난 중에 태어났다. 종군 사진작가였던 아버지는 6·25전쟁 중 전사하고 홀어머니 밑에서 어렵게 자랐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서울에 정착하였으며, 1966년 대광고에 진학하여 졸업 시 미술대학과 인문계 국문학과 사이에서 고민하다 1969년 연세대 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수석으로 입학하여 재학 중 학과 내에 연극부 창설을 주도했다. 그리고 연세문학회, 교지 기자, 교내방송국 PD 등으로 활동했다. 1973년 수석 졸업 후 곧이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대학원 재학 중에 마당극 ‘양반전’ 각색·연출을 맡았다.
1975년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국문학과 강사가 되고, 이후 1978년까지 연세대, 한양대, 강원대 등에서 강사로 활동했다. 1977년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여섯 편의 시를 발표하여 박두진 시인 추천으로 문단(文壇)에 데뷔하였다. 1977년 2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1983년 ‘윤동주(尹東柱, 1917-1945) 연구’ 논문으로 연세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윤동주 연구’로 문학박사가 된 마광수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인 올해 세상을 떠난 것이다. 마광수는 윤동주 시(詩)에 나타난 상징적인 표현을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연구했으며, 상징적 표현과 관련된 시대적 배경을 배려하여 객관적으로 윤동주 시의 본체를 파악하였다. ‘윤동주 연구’는 철학과현실사 출판사에서 2005년 5월 239쪽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1979~1983년 홍익대 사대 국어교육학과 조교수로 재직 후, 박사학위 취득과 함께 1984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助敎授)로 임용된 마광수는 제5공화국과 6공화국 시절부터 문학의 지나친 교훈성(敎訓性)과 위선(僞善)을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풍자했다. 동시에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85년 결혼했으나 1990년 이혼했다.
1989년 장편소설 <권태>로 소설계에 데뷔한 후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출간하였으나 언론의 혹평을 받았고, 대학에서 강의가 취소되는 시련을 겪었다. 1992년에는 장편소설 <즐거운 사라>가 외설적(猥褻的)이라는 이유로 구속되었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소설 ‘즐거운 사라’는 성관계를 노골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묘사해 성욕(性慾)을 자극한다”며 총 17개 부분을 적시했다.
마광수는 구속 파문으로 1993년 연세대로부터 교수직위가 해제되었고, 1995년 8월 대법원에서 유죄가 확정되어 교수직에서 해직되었다. 1995년 연세대 국문과 학생들은 ‘마광수는 옳다’는 책을 발간하며 항의했다. 1998년 김대중 정부에 의해 사면·복권되어 연세대에 복직했다.
그러나 2000년에는 교수 재임용 심사에서 탈락했으며, 2002년 우울증으로 휴직 후 복직하였다. 마광수는 2005년 연세대 국문과 정교수(正敎授)로 임용된 후 2016년 정년 퇴임했다. 마광수는 자살하기 전까지 집필 활동을 계속하였으며, 2017년 등단(登壇) 40년을 맞아 시선집 <마광수 시선>을 펴냈다.
‘20세기 가장 위험한 거인(巨人)’이라 불렸던 미국의 소설가 헨리 밀러(Henry Miller, 1891-1980)도 프랑스에서 출판한 1930년대 작품 <북회귀선>(北回歸線) <남회귀선>에서 대담하고 솔직한 성(性) 묘사 때문에 미국에서 오랫동안 수입이 금지됐다. 1961년 미국판 출판이 가능하게 된 뒤로도 그를 ‘포르노 소설가’로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국내에서 외설성 문학작품이 사법처리된 첫 사례는 1969년 건국대 박승훈 교수의 소설 <영점하의 새끼들>이다. 박승훈은 그해 7월 형법상 음란물제조 혐의로 구속되었다. 1973년에는 <반노>(叛奴)를 쓴 염재만 작가도 같은 혐의로 기소됐다. 두 사람은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판결을 받았다.
음란물제조 혐의로 최종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즐거운 사라’를 쓴 마광수가 처음이다. 문단에서도 마광수에게 우호적이지 않아 ‘왕따’를 당했다. 문학가(文學家) 마광수는 자기가 하고픈 말을 모두 그의 작품 속에 쏟아 부었다. 그 대가(代價)로 대학교수 해직과 소송, 징역, 왕따 등을 두루 겪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저 세상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