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문자를 받았다···”Y별세, 빈소는 00병원 장례식장”
60년지기 마지막 보내는 길 “먼저 가 있거라, 친구. 곧 만나자”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전 경찰청 수사국장] 휴대폰 벨소리가 울렸다. 문자 메시지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다. 열어보고 한동안 말을 잃었다. 화면에는 ‘Y별세, 빈소는 서울 삼성병원 장례식장’이란 문구가 찍혀 있었다.
Y는 중고교를 함께 다닌 친구다. 당시 우리 집은 학교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었고, Y의 집은 나의 등굣길 길목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등·하교 길을 함께 하였고, 우리들은 가까워졌다.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더욱 가까워졌다.
나는 Y의 집에 자주 놀러 갔다. 때가 되면 밥을 얻어먹으며 공부, 문학 등 관심이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 노벨문학상을 받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졸업 후 우리의 만남은 뜸해졌다. 서로 다른 대학으로 진학하였고, 이후 Y는 사업을 하고 나는 공무원으로 취직을 하였다.
목소리
서로 활동하는 분야가 다르고, 생활에 바쁘다 보니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친구들의 경조사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을 뿐이었다. 점점 사이가 소원해졌다. 기회가 되면 만나고, 어쩌다 생각나면 전화통화를 하면서 세월이 흘렀다. 어느 덧 나이가 70이 넘었다.
얼마 전 Y가 사업을 접고 낙향하였다는 소식이 들렸다. 전화를 하니 Y는 내 목소리를 곧 알아 차렸다.
“어떻게 된 거야?”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잖아? 힘도 달리고 그래서 내려왔어.”
말은 힘이 줄었다고 하지만 전화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힘이 넘쳤다. 잠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고 전화를 끊었다. 오래 전 일이 아니었다.
충격
Y의 사망소식은 뜻밖이었다. 물론 70이 넘은 나이는 죽음과 거리가 아주 먼 것은 아니다. 벌써 여러 명의 동기들이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평균 생존 연령은 80세를 넘는다. 70이 넘어서도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주위에 널려 있다.
Y도 이러한 건강한 사람에 속하였다. 얼굴 혈색이 보기 좋았고 지병도 있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경제력이 괜찮다고 알려져 있으니 건강관리를 잘 하였을 것이다. 이런 Y의 갑작스런 사망소식은 나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다. 잠시 후 충격이 가셨다. 사진 속의 얼굴이지만 만나서 작별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리 때문만은 아니다. 그동안 나누었던 정이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또 그러고 싶었다. 내가 사는 곳은 경기도 가평 북쪽 화악산 자락이다. 서울 삼성병원까지는 상당한 거리다.
아직
나는 70살을 넘기면서부터 서울 나들이 할 때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한다. 이곳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삼성병원까지 가려면 3시간 가까이 걸린다. 오늘은 갔다 오기가 어렵다. 내일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이때 갑자기 조문이 가기 싫어졌다. 내가 조문을 한다는 것은 그 친구의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죽음을 처리하는 행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 몸이 아직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퇴직 후 생활태도를 바꾸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위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면서, 그것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을 따지면서 살았다. 나는 이것이 싫었다. 퇴직을 하면서 재고 따지는 좌고우면의 생활에서 벗어나 발 가는 대로 가고, 생각나는 대로 살기로 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지금까지의 도리, 격식, 이해 등에 얽매이지 않고 편하게 살기로 마음먹었다. 가평 산골짜기로 들어온 이유도 편하고 자유롭게 살기 위한 것이었다.
나의 이러한 생활 자세를 고려한다면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는 것이 맞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Y의 마지막 가는 길, 사진이라도 보면서 작별을 하고 싶었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을 때 휴대폰 벨이 울렸다. 받으니 K의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K역시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던 중·고등학교 친구다.
“야 너 Y 빈소에 다녀왔냐?”
“아니”
“그럼 내일 거기서 만나자”
가느냐 마느냐를 놓고 주저하는 나의 생각을 알지 못한 제안이다. 망설이던 마음이 친구의 목소리에 가는 쪽으로 기울었다. 오전 11시에 만나기로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
국화꽃
편지 봉투를 꺼내서 賻儀라고 쓰려고 펜을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문구는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Y야, 잘 가거라” 라고 쓰고 싶었다. 그런데 이것은 비록 친구였지만 망자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아 “Y님 편히 가십시오, 명복을 빕니다” 라고 적었다.
다음 날 삼성병원에 도착한 시각은 11시가 채 되지 않았다. K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빈소에 들어가니 Y의 사진이 국화꽃에 둘려 싸여 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와 같은 충격이 느껴졌다.
Y는 사진 속에서 내 시선을 받고 있었다. 잠시 응시하다가 속으로 “잘 가거라” 하고 문상을 마쳤다.
문상은 아들과 사위가 받고 있었다. 갑작스런 사망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심근경색이라 한다.
사방천지에 죽음
문상객을 접대하는 자리에 앉아 음식을 먹고 있으려니 K가 왔다. K는 사망상황을 좀 더 소상히 알고 있었다. 혼자 방에서 자고 있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다는 것이다. 옆에 사람이 없어 사망한 것을 다음 날에야 알았다 한다.
허망했다. 밤새 안녕이라더니 바로 이런 상황인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 전철 안에서 친구의 사망이 왜 나에게 충격이 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죽음은 충격을 준다. 모든 죽음이 그렇다. 내가 사는 곳은 시골이다. 죽음을 자주 접한다.
아침에 나가면 풍뎅이, 벌, 나비, 매미 등 곤충은 물론 새. 뱀들이 죽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들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면 짠한 느낌을 받는다. 슬픈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생명은 슬프다는 말을 실감한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
생명은 죽음을 전제로 태어난다. 죽음과 태어남은 똑 같은 자연현상이다. 봄에 새싹이 돋는 것과 같이 극히 일상적이고 평범한 일이다. 그런데도 죽음은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다. 충격을 받는다. 태어남은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이면서 죽음은 왜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 하는 것일까?
내가 생명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생명보존본능을 가지고 있다. 이 본능은 죽음을 거부한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기를 원하고, 그렇게 되도록 애쓴다. 죽음은 본능의 이러한 희망과 노력을 좌절시킨다. 본능과 충돌한다. 이 충돌에서 충격이 일어난다. 다른 존재의 죽음일지라도 거기에서 나의 죽음을 보게 되고 충격을 받게 된다. 죽음이 주는 충격이 똑 같지는 않다. 나와의 관계에 따라 강도가 달라진다.
상실
자주 만나고 깊은 정을 나누던 사람의 죽음은 충격이 더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덜하다. 동년배이거나 나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은 충격이 더하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덜하다. 그 이유는 아마도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은 다시는 그 사람을 볼 수 없다는 상실감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고, 동년배나 어린 사람의 죽음의 경우에는 나의 죽음과 거리가 가깝기 때문이리라.
Y의 죽음은 친구를 잃은 상실감과 함께 죽음이란 것이 나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을 주기에 충격이 큰 것이리라.
그러나 죽음이 슬프고 쓸쓸한 것만은 아니다. 생명보존 본능의 지배를 받는 생명체로서는 동의하기 어려우나 아름다울 수도 있다. 군무를 하듯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는 낙엽들의 모습은 아름답다.
사람의 죽음에서도 아름답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을 때와 법정스님께서 입적하셨을 때다.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슬프고 안타까운 사람의 죽음이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그 때 느꼈다. 그 분들의 아름다운 삶이 죽음을 아름답게 만드신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