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종교 어제와 오늘①] 종교 부패하면 신도들 언제든 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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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엔=조현 <한겨레> 종교전문기자] 종교란 따지고 보면 나누는 것이다. 위대한 진리를 가지신 분이 그 좋은 것을 나누지 않고 혼자만 알고 있다가 가버렸다면 종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좋은 마음을 나누었기에 종교가 되었다. 그래서 종교란 좋은 마음을 끌어내서 선의를 확장 시키는 것이다. 서로의 좋은 마음들이 자라서 서로가 잘 어울려 행복한 사람,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게 된다. 종교의 뿌리였던 분들도 그런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좋은 마음을 나누기보다는 자신의 이익만을 확장하고, 자신의 신앙, 신념만을 확장하려 하고, 패거리를 나누는 종교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종교 밖에서 이런 나누기를 하는 분들이 늘어나는 것 아닐까 한다.

종교를 무릇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얻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부터 천하를 얻으려면 민심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고대 그리스의 정복 군주 알렉산더는 어느 곳에 가든지 그 나라 종교 사원에 가서 성직자를 가장 먼저 만났다. 종교가 사람의 마음이 모이는 곳이기 때문에, 칼이 아니라 마음으로 먼저 민심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땅을 정복했던 몽골의 칭기스칸도 가는 곳마다 명산에 가서 하늘신과 소통하는 기도를 가장 먼저 했다. 진실한 기도일 수도 있지만, 민심을 얻기 위한 이벤트였을 수도 있다. 칭기스칸의 책사로 제갈공명 같은 전략가였던 야율초재는 여일리불약제일해(與一利不若除一害) 생일사불약멸일사(生一事不若滅一事)라는 슬로건을 지녔던 인물이다. “하나의 이익을 얻는 것이, 하나의 해를 없애는 것만 못하고, 하나의 일을 만드는 것이 하나의 일을 않는 것만 못하다”는 것이다. 끊임 없는 욕망으로 온 세상을 정복하려 나섰던 그들이지만 하나를 얻기 전에 하나를 버릴 줄 알았던 것이다. 세상의 고수들은 그런 심층적 종교의 가르침을 알고 행할 줄 알았다.

그들이 붓다와 예수 같은 성인은 아니었고 그같은 선행을 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 나름대로 심층적인 정신세계를 알고, 현실세계에 활용할 줄 알았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홍익인간과 재세이화(在世理化), 이도여치(以道與治), 광명이세(光明理世)의 가르침이 있다.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 “세상에 있으면서 다스려 교화한다”, “도로써 세상을 다스린다”,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 안에 종교의 핵심이 모두 들어있다.

우리나라엔 남다른 도가 있었다. 신라의 최치원은 12살에 당나라에서 유학해 빈공과라는 과거에 장원을 했다. ‘토황소격문’을 써서 탁월한 문장력으로 황소의 난을 평정하는데 지대한 공을 세우고 귀국한 천재였다. 요즘으로 보자면 한국인이 미국 하버드대로 유학 가서 수석졸업을 하고 미국에서 이름을 떨친 뒤 금의환향한 것이다.

그가 너무 어린 나이에 고국을 떠났기 때문에 고국의 진리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세상에서 가장 선진국이었던 당나라에서 유교·불교·선도를 다 섭렵하고 고국에 돌아와 보니 고국에 이미 유불도의 핵심을 다 갖춘 현묘한 도인 풍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난랑비문(鸞郞碑文)에 새겨있다.

이제 한국종교의 특수성 즉 왜 이렇게 독특한 현상을 낳게 됐는지 알아보자. 결론부터 말하면 이 땅에서 어떤 종교들이 씨를 뿌리면 쉽게 열매를 맺고, 사람들의 종교 열기가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고대부터 수많은 외세의 침략과 浮沈을 거치면서 고귀한 진리를 찾기 위한 치열한 몸짓과 내면의 심층적 진리 즉 양심을 발견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지금의 주류종교가 내일도 주류가 된다는 보장이 없다. 주류종교는 정치적 상황과 지배층의 선택에 의해 끊임 없이 변해왔다. 고조선의 무속-삼국시대 선도-통일신라시대와 고려의 불교-조선의 유교-구한말 일제의 민족종교-대한민국의 기독교 등이 그것이다.

유럽이나 미주는 기독교, 인도는 힌두, 동남아시아는 불교, 중동은 이슬람교 등 한 지역에서 한 종교가 뿌리를 내리면 그 종교가 지속되고 있는데 반해, 한국에선 주요 종교가 계속 바뀌어왔다.

한국은 고대에 천손민족(天孫民族)으로서 고유한 선도와 무속이 지배하는 신정일치 사회였다.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무당의 우두머리’(제사장)란 말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전한다. 4세기 무렵 중국으로 부터 유교와 불교가 전래됐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 등 3국은 유교를 유학이란 학문으로 받아들인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불교는 달랐다. 훗날 3국을 통일한 신라(B.C 57~AD 935)의 왕들은 불교를 받아들여 불교를 적극 장려했다. 통일신라는 불교를 3국의 민심을 하나로 묶는데 활용했다. 통일신라에 이어 등장한 고려(918~1392)도 불교가 국교였다.

그런데 1천년 동안 지배종교였던 불교는 조선시대(1392~1910)에 급전직하로 추락한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정도전이 옛것을 부수고, 새로운 기풍을 만들어가기 위해 ‘억불숭유’ 정책을 폈기 때문이다. 태조왕은 불교 승려들의 한양 도성 출입도 금지하고, 승려들을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추락시켰다. 대신 모든 고을에 유교적 예식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유학을 배우는 향교와 사당을 짓게 했다. 이에 따라 왕부터 각 마을의 향반에서 가정까지 조선은 유가의 선비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다. 도심에 있던 불교 사찰들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500년을 지배했던 유교가 지금은 한국에서 ‘문화’와 ‘관습’으로만 남아있을 뿐, 조선이 패망한 지 불과 100년만에 종교로서 명맥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선 후기인 19세기와 20세기 초반까지는 조정과 관리들의 무능과 부패로 혼란기에 접어들어 민심이 이반하고, 제국주의 침략이 거세지면서 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한 자생종교들이 시대를 풍미했다.

천도교는 가톨릭의 서학(서양학문이란 뜻)과 대립되는 뜻인 동학(동양의 학문)이란 이름으로 1860년 등장했다. 동학은 반외세와 반봉건을 부르짖으며 민중들을 결집해 봉기를 일으켰다. 동학은 관과 일제에 의해 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1919년 3·1운동 때도 독립운동 자금을 대며 주류 종교로 활약했다. 당시 2천만 국민 가운데 한때 신자가 300만에 이를 정도였다. 하늘의 옥황상제가 직접 하강했다는 강증산이란 인물의 의해 창시된 증산교도 한때 200만명 가량의 신자를 끌어모았다. 한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교주로 한 대종교는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전진기지 구실을 했다.

그런데 한 시대의 주류종교였던 천도교와 증산도 등이 요즘은 신자 수가 수만명에 불과한 채 주류종교 자리를 개신교와 가톨릭 등 기독교가 채우고 있다. 가히 한국은 “한번 주류종교면 영원한 주류종교가 된다”는 공식이 맞지 않은 나라인 셈이다. 따라서 한국에선 정치적 변화에 의해 주류종교가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또 종교가 ‘시대의 등불’로서 기능을 상실하고, 부패할 경우 어떤 종교라도 대중들에 의해 외면될 수 있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해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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