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민의 예술감평] ‘잠 못 이루는 도시’ 시애틀을 날다···톰 행크스·데미 무어·멕 라이언
[아시아엔=박용민 주르완다 대사] 미국 본토 최북단의 대도시 시애틀. 해안으로부터 거리가 무려 1백마일이 넘는데도 이곳은 소금기를 머금은 항구도시다. 마치 옷장 밑으로 들어간 반지를 꺼내려는 팔처럼 내륙 깊숙이까지 들어온 바다, 퓨짓 만(Puget Sound)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시애틀 건너편에는 과거 군사기지였던 포트 워든(For Worden)이 있다. 실제 해군훈련소가 있는 건 아니지만, 여기서 촬영한 영화가 해군장교후보생들의 사랑과 애환을 그린 테일러 헥포드(Taylor Hackford) 감독의 1982년 걸작 <An Officer and a Gentleman>이다.
풍부한 수자원의 혜택으로, 시애틀 일대는 선사시대부터 활발한 정착 및 유목생산 활동의 근거지였다. 물만 끼고 있는 게 아니다. 시애틀의 스카이라인 뒤편으로는 올림픽 산맥의 봉우리들이 펼쳐져 있다. 가장 높은 올림퍼스산(Mount Olympus)의 높이는 2386m에 달한다. 그래서 시애틀 주민들은 1년 내내 요트와 낚시는 물론, 스키와 하이킹도 즐길 수 있다. 시애틀이라는 명칭은 그 일대에 살던 원주민 다우압쉬(Duw Absh)족의 ‘시아흘(Sealth)’이라는 추장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환경 덕분에, 시애틀은 1987년 코메디 영화 <Harry and the Hendersons>의 배경이 되었다. 나중에 TV시트콤으로도 만들어진 이 영화는, 인근의 산으로 캠핑 갔던 일가족이 원주민 전설 속의 동물인 빅풋(Bigfoot)을 만나면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을 그렸다.
대륙의 서북쪽 끝에 있다 보니 유럽인들이 정착한 것은 19세기 중반이 되어서였지만, 오늘날 시애틀은 미국 북서부의 해상수송, 경제, 문화, 교육의 중심지 역할을 해내고 있다. 시애틀은 전국에서 문자해독율이 제일 높을 뿐 아니라, 거주자 중 대졸 학력자 비율도 가장 높다. 영국 컨설팅회사 머서(Mercer)사의 2009년 조사결과 해외근무자가 살기 가장 좋은 도시의 명단에서 시애틀은 50위를 차지했다. 위생, 범죄, 주택, 환경, 금융, 소비, 공공서비스, 여가생활 등을 감안하면 세계에서 50번째로 살기 좋은 도시라는 뜻이다. 지금은 아마존닷컴을 비롯한 각종 첨단 기업들의 본거지가 되었다.
그래서 시애틀은 종종 첨단을 걷는 기업들에 관한 영화의 배경으로도 등장한다. 직장상사인 드미 무어(Demi Moore)가 마이클 더글라스(Michael Douglas)를 성추행하던 마이클 크라이튼(Michael Crichton) 원작의 1994년 영화 <Disclosure>는 시애틀의 소프트웨어회사 디지컴(DigiCom)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가 줄거리를 이룬다. 2006년 <Firewall>에서 금융사기범에게 가족을 납치당하고 고군분투하던 해리슨 포드(Harrison Ford)의 직업은 시애틀 은행의 간부였다.
시애틀은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서 1950년대에 이르기까지 20십여곳의 재즈클럽이 여기서 영업을 했다. 레이 찰스(Ray Charles)와 퀸시 존즈(Quincy Jones)가 음악활동을 시작한 곳이 시애틀의 나이트클럽이다. 기타를 들고 지구에 온 외계인이라는 평을 듣는 지미 핸드릭스(Jimi Hendrix)의 고향도 시애틀이다. 좀더 최근에 너바나(Nirvana), 펄잼(Pearl Jam) 같은 그룹이 그런지 락(grunge rock)을 전파하기 시작한 것도 이곳에서부터였다.
음악의 도시 시애틀을 그린 영화로는 1989년의 <The Fabulous Baker Boys>가 있다. 실제 형제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와 보 브리지스(Beau Bridges)가 형제 재즈 피아니스트로 출연하여, 가수역을 맡은 미쉘 파이퍼(Michelle Pfeiffer)를 사이에 두고 미묘한 감정대립을 겪는다. 두 명의 원숙한 남자배우가 프로 연주자의 숙달된 연주를 서글프게, 또는 그 삶의 서글픔을 숙달되게 연기하는 모습은 멋지다. 데이브 그루신(Dave Grusin)의 음악도 좋다. 그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이 영화가 음악을 다룬 진지한 방식이다. 세 사람의 행복과 고통과 두려움 같은 온갖 삶의 기미들을 영화는 음악으로 절묘하게 엮어낸다. 한때 웨스트코스트 재즈의 본고장이던 시애틀은 그래서 이 영화에 잘 어울리는 무대다.
시애틀에서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 하나 더 있다. 시애틀의 별명은 ‘비의 도시(Rain City)’다. 이곳에서 종일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는 날은 연평균 70일 정도에 불과하다. 맑은 날은 주로 여름에 찾아온다. 대륙의 서안이라서 혹독한 추위는 없지만, 겨울에는 거의 내내 비가 내리고 안개도 자주 낀다. 폭우가 퍼붓는 일은 드물어서 연중 강우량이 달리 많은 건 아니지만, 1년 중 절반 정도가 비 오는 날이고, 그 나머지의 절반 정도는 흐린 날씨다. 여름철에 퍼붓는 비는 장쾌하지만, 겨울에 내리는 가랑비는 우울하다.
시애틀이 자살률이 높은 우울한 도시라는 항간의 소문은 거짓에 가깝다. 나는 그런 속설을 증명해줄 통계를 찾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마치 도시전설(urban legend)처럼 ‘시애틀 자살 빈발설’이 재생산되는 데는 축축하게 비가 내리는 겨울의 이미지가 한몫 거들고 있음에 틀림없다. 밤에 생각할 것이 많은 곳인지, 시애틀 주민들은 커피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걸로도 유명하다. 세계적인 체인이 된 스타벅스(Starbucks)와 툴리스(Tully’s)가 여기서 창업했다.
자, 이런 도시의 이미지만 가지고 평균적인 시애틀 시민을 한번 상상해 보자. 높은 학력을 바탕으로 세련된 직업을 가지고 비교적 유복한 삶을 사는 사람. 비 내리고 안개 끼는 음악의 도시 주민답게 섬세한 감수성을 가진 사람. 진보적인 정치성향을 바탕으로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삶을 사는, 그러나 다정다감한 사람. 커피를 즐기면서, 밤늦도록 고민할 울적한 개인사를 가진 사람. 그런 사내가 주인공을 맡은 시애틀 영화가 있다.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 주연의 1993년 영화 <Sleepless in Seattle>은 시애틀의 별명을 ‘잠 못 드는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암에 걸린 아내와 사별한 설계사 샘 볼드윈(톰 행크스 분)은 여덟 살 난 아들 조나와 함께 시애틀에 산다. 그는 떠나보낸 아내를 아직 잊지 못하는 순정남이다.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에 꼬마 조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 아빠가 새엄마를 만나면 좋겠다고 말한다. 아들이 졸라서 졸지에 라디오에 출연하게 된 샘은 죽은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전국에 생방송으로 토로한다. 방송에서 ‘시애틀의 잠 못 드는 아무개씨(Sleepless in Seattle)’로 소개된 그의 사연에 많은 여성 청취자가 감동한다. 남자친구에게 뭔가 로맨틱한 면이 부족하다고 느끼던 <볼티모어 선>(Baltimore Sun)의 기자 애니 리드(멕 라이언 분)도 이 방송을 듣는다.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이 함께 나온 포스터를 보고 극장을 찾은 관객은 이 두 주인공들이 결국 맺어지리라는 걸 이미 안다. 하지만 더 자세한 줄거리를 소개하는 건 필요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을 성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