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용민 대사의 예술산책] “영화는 도시다”···꿈꾸는 첨탑 옥스포드 명화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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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첨탑의 도시’ 옥스퍼드 저녁노을 떠올려

[아시아엔=주르완대 대사] 영국 옥스퍼드 한복판에 있는 Magdalen College 앞에서 길을 막고 ‘막달렌 컬리지’가 어딘지 물어봐도 소용이 없다. ‘막달렌’이 아니라 ‘모오들린’이라고 읽기 때문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 C.S. 루이스(1898-1963)는 모들린 컬리지의 교수였다. 그의 삶과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1993년 리처드 아텐보로(Richard Attenborough) 감독이 만든, 안토니 홉킨즈(Anthony Hopkins)와 데브라 윙거(Debra Winger) 주연의 <Shadowlands>.

1950년대의 어느 해. 루이스 교수는 동생과 함께 우아하고 단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꼭 그가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처럼 예의 바르고 말수가 적다. 그런 그의 삶 속으로 조이 그래셤과 그녀의 아들 더글라스가 뛰어든다. 그녀는 미국인이고(그러니까 직선적이고), 시인이며(그러니까 당돌하고), 아들을 둔 이혼녀이고(그러니까 쑥맥처럼 굴 필요를 못 느끼는데다), 미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전력도 있는 열혈 여성이다. 이 여성이 옥스퍼드의 질서에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루이스 교수가 그녀에게 익숙해져 가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는 깊은 사랑이 싹튼다. 다소 생뚱맞을 수도 있는 이 연애가 설득력 있게 보이는 것은, 이것이 엄연한 실화라는 사실과, 두 명배우가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학작용 덕분이다.

조이 그래셤이 영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루이스 교수는 그녀와 서류상으로 결혼한다. 그런데 그녀가 암진단을 받고 죽음을 향해 시들어가면서, 그의 사랑은 도리어 불타오른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더없는 신파극처럼 보인다. 위장결혼이 진정한 사랑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깊고 푸른 밤> 이래 <파이란>, <댄서의 순정> 등 우리 영화에서도 숱하게 보았던 소재다. 그래도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우리네 인생이란 게 당초부터 신파극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드라마는 멜로드라마라는 어쩔 수 없는 진리를, <Shadowlands>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안토니 홉킨즈가 연기하는 인물이 C.S. 루이스라는 사실이라든지, 그가 어떤 작품의 작가인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노 교수와 시한부 삶을 사는 여류시인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옥스퍼드라는 사실은 꽤나 중요하다. 옥스퍼드의 고색창연한 도시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데브라 윙거가 연기하는 미국인 조이 그래셤은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가 발음하는 미국 억양의 영어는 마치 방송국에서 혼자 사투리를 쓰는 아나운서처럼 안쓰럽게 들린다. 그런 그녀가 잔잔한 연못에 바윗돌을 던진 것처럼, 루이스 교수의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조이 그래셤의 역할을 잘 소화한 데브라 윙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을 뻔’ 했던 1994년, 나는 옥스퍼드에 살고 있었다. 1993년 여름, 만삭이던 아내와 함께 난생 처음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유학을 와서 어설픈 살림을 꾸린 곳이 옥스퍼드대학의 기혼자 기숙사였다. 옥스퍼드에 도착하던 날, 차창 밖으로 처음 본 그 풍경의 경이로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첨탑을 가진 중세의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 그 사이사이를 자전거로 누비는 학생들.

옥스퍼드의 별명은 ‘꿈꾸는 첨탑들의 도시(The City of Dreaming Spires)’다. 컬리지(college)라고 부르는 유서 깊은 여러 학교들이 옥스퍼드 유니버시티(Oxford University)를, 그리고 도시를 이루고 있다. 학생들은 시험 때와 컬리지 만찬 때 검은 가운을 입도록 되어 있다. 시험 날이 되면 옥스퍼드 거리는 펄럭이는 가운을 나부끼며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옥스퍼드의 주점에서는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주인이 손에 든 종을 딸랑딸랑 울리며 손님들 사이로 라틴어로 뭐라뭐라 외치며 돌아다닌다.

여름이 되면 옥스퍼드의 아름다움은 밝은 태양빛 아래 활짝 피어난다. 학생들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처웰(Cherwell) 강에서 ‘펀트(punt)’라는 배를 타고 천천히 강물을 거스르며 햇살을 즐긴다. 펀트에 몸을 싣고 강물 위에 떠있노라면, 시간이 홀연 느린 속도로 흘러간다. 펀트는 얼핏 보면 베네치아의 곤돌라와 흡사해 보이는데, 곤돌라는 노를 저어 가지만 펀트는 긴 막대기로 얕은 강바닥을 찍어 밀면서 간다.

옥스퍼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건축물을 두 개만 꼽아보자면,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Christ Church College)와 래드클리프 카메라(Radcliffe Camera)를 들 수 있겠다. 영화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그레이트 홀(Great Hall)은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식당을 베낀 것이다.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의 일부인 래드클리프 카메라는 그 독특한 외관으로 주목을 끌기 때문에 <The Saint>(1997), <An Education>(2009) 등 옥스퍼드를 배경으로 사용하는 영화에는 반드시 등장한다.

영어가 ‘English’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듯이, 영국식 영어는 미국 영어에 비해서 훨씬 더 기품 있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표준어로 치는 것이 바로 ‘Oxford English’다. 미국 사람들도 옥스퍼드에 오면 이 도시가 상징하는 역사와 전통 앞에서 주눅이 드는 모양이다. 1938년 MGM이 만든 <A Yank at Oxford>라는 영화가 있었다. ‘30년대의 톰 크루즈’였던 로버트 테일러가 주인공이고, 비록 조역이지만 풋내기 시절의 비비언 리도 등장한다.

미국의 고향에서 만능 운동선수 겸 우등생인 리 쉐리던(로버트 테일러 분)은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로 유학을 온다. 런던에서 옥스퍼드로 오는 기차 안에서 만난 옥스퍼드 학생들에게 잘난 체를 한 덕분에, 그는 도착한 날부터 가짜 환영식으로 골림을 당한다. 비비언 리는 나이 많은 서점주인의 아내이면서 젊고 잘 생긴 학생들을 유혹하는 엘자라는 유부녀 역할을 맡았다. 쉐리던이 옥스퍼드에 도착하던 첫날부터 그와 앙숙이 된 폴이라는 영국 청년이 있다. 폴은 엘자와 밀애를 나누다가 부적절한 관계가 발각될 위기에 놓이는데, 쉐리던은 자신이 불리한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입을 다물어 퇴학당할 위기에 처한다. 때마침 아들을 만나러 미국에서 건너온 쉐리던의 아버지가 발휘한 기지 덕분에 모든 사람이 위기를 넘기고, 쉐리던과 폴은 나란히 보트 경주대회에 출전해 숙적인 케임브리지대를 이긴다.

지금 보면 어수룩한 옛날식 유머로 포장된 미국식 얄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옥스퍼드에 온 양키 쉐리던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큰소리를 치며 유학생활을 헤쳐 나가는데, 이 역할은 로버트 테일러가 영화에서 보여준 가운데 가장 활기차고 야성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 속에서 쉐리던이 주눅 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거꾸로 미국인들이 영국에 대해서 가지는 자격지심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흥미롭다. 실은 <A Yank at Oxford>라는 제목 자체가 마치 ‘촌놈 상경기’같은 냄새를 풍긴다. 미국 사람이 촌사람이 되는 곳. 옥스퍼드는 그런 도시다. 영국이 유럽공동체를 뛰쳐나간들 그 점이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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