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르완다 박용민 대사의 예술감평] 여성 최초 아카데미 감독상 비글로우의 ‘Hurt Locker’와 ‘Zero Dark Thirty’
[아시아엔=박용민 주르완대 대사] 1989년 제이미 리 커티스(Jamie Lee Curtis)가 출연한 <Blue Steel>이라는 영화가 있다. 신참 여경 터너(커티스 분)가 용의자를 살해했는데, 용의자의 권총을 슬쩍 훔쳐간 변태적인 사이코패스(론 실버) 때문에 정직을 당하고 그놈한테 스토킹을 당하다가 결국 물리친다는 줄거리다. 용의자의 권총을 분실하고 애를 먹는 줄거리 때문에 <Blue Steel>이라는 제목은 권총을 연상시킨다. 속어로 ‘Men in Blue’라고 하면 경찰을 가리키는 데서 보듯이, 푸른색은 미국 경찰을 상징하는 색깔이기도 하다.
한참 고시 공부를 하던 무렵에 휴식 삼아 본 영화였기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는 건지도 모르겠다. (어렵사리 얻은 휴식은 얼마나 더 달콤한지!) 영화를 본 다음에 확인해 봤더니 감독이 여성이었다. 별로 이상하지는 않았다. 여자 경찰이 악당에게 추근거림을 당하다가 무찌르는 줄거리를 쉽사리 페미니즘 코드로 읽을 수도 있는 영화였기 때문이다. 다만 여성 감독이 만든 영화 치고는 남성 취향의 액션과 서스펜스 가득한, 선이 굵은 스릴러였다는 게 특이했다. 캐서린 비글로우(Kathryn Bigelow)라는 감독의 이름은 필자에게 그때 각인되었다.
그 후로도 드문드문 비글로우 감독의 이름을 접할 수 있었는데, 내가 만난 그녀의 작품은 폭력이 가득한 액션물 일색이었다. 서핑을 즐기며 강도를 일삼는 악당(페트릭 스웨이지) 조직에 FBI 요원(키아누 리브스)이 잠입하는 영화 <Point Break>가 그랬고, 전직 경찰(랄프 파인즈)이 LA를 무대로 가상현실 기계와 관련된 음모에 연루되는 영화 <Strange Days>도 그랬다.
<Strange Days>의 각본은 제임스 카메론(James Cameron) 감독이 썼다. 알고 보니 두 사람은 부부였다. 2년만 함께 살고 이혼했다. 잘 아는 대로, 제임스 카메룬은 <Terminator>, <Aliens>, <The Abyss>, <Titanic>, <Avatar>의 감독이다. 그는 재능 있는 스토리텔러이기도 하지만 그의 주특기는 스토리보다는 역시 ‘놀라운 화면’ 쪽에 가깝다. 그러고 보면 <Strange Days>에서 볼 수 있는 기발한 시각적 장치들은 각본을 쓴 남편 몫, 하드 코어 폭력은 메가폰을 쥔 부인 몫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캐서린 비글로우는 2009년 <Hurt Locker>라는 문제작으로 큰 일을 낸다.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포함한 6개 오스카를 싹쓸이한 거다. 이로써 비글로우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이 되었다. 정작 <Hurt Locker>가 그해에 노미네이트된 작품들 중에서 ‘가장 덜 여성적인’ 영화였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그해 시상식에 전 남편인 카메론은 어린이의 꿈과 상상을 자극하는 <Avatar>를, 비글로우는 화약과 피 냄새 가득한 <Hurt Locker>를 들고 나왔다. 그걸 보면서 “저 두 사람은 함께 살 때 참 특이한 부부였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아마도 페미니즘의 틀은 캐서린 비글로우를 가두기에 너무 비좁았던 모양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여성으로서 영화를 감독하다 보면 여러 어려움을 겪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런 어려움들을 그냥 무시하는 쪽을 선택해요. 내가 여자인 걸 바꿀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영화를 그만 만들 수도 없으니까요.” 아마도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어려움’ 따위는 그녀에게 사소하고 시시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비글로우는 학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컬럼비아대에서 영화로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학교에서 만든 그녀의 단편영화도 ‘폭력의 해체’를 주제로 한 것이었는데, 이 영화를 감독하면서 배우들에게 실제로 치고받으며 싸울 것을 주문했다고 한다. 그녀는 ‘폭력의 폭력성’에 천착하는 것처럼 보인다. 주먹질과 총탄과 폭탄은 그 자체로서 아프고 다치고 죽게 만드는 힘일 뿐만 아니라 폭력을 가하고, 당하고, 목격하는 모든 사람들의 삶을 황량하게 만드는 더 근원적인 폭력성도 지니고 있다. 폭력이 가지는 그런 난폭한 힘의 정체를 시각적으로 잡아내기 위해 그녀가 자주 사용한 기법은 고속촬영을 이용한 슬로우모션이다.
<Hurt Locker>는 2010년에 본 ‘가장 굉장한’ 영화였다. 전쟁 후 이라크는 누가 적인지도 분별하기 어렵고 명확한 전략적 목표도 세울 수 없는 치안 불안상태에 있었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상황을 소재로 저토록 뚜렷한 감동을 생산할 수 있다니! Hurt Locker라는 알쏭달쏭한 말은 미군들의 속어로 ‘전투중 입은 심한 부상’을 가리키는 표현이라고 한다. 잘 알려진 말은 아니기 때문에 미국사람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제목이다. 더러는 ‘상처받은 영혼들이 갇혀 사는 세상’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사람도 보았다.
이 영화는 제레미 레너(Jeremy Renner)라는 스타를 배출했다. 찰슨 브론슨, 제임스 코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계보를 잇는 것처럼 보이는 단단한 액션배우다. 영화 속에서 이라크 근무를 마치고 고향 집으로 돌아온 그가 슈퍼마켓의 복도에 서서 끝없이 늘어선 시리얼 상자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하는 장면은 아무런 대사 없이도 복잡한 느낌을 전해준다. “어제까지 폭발물 테러가 난무하던 곳에 있었는데, 지구의 다른 구석에서는 이처럼 무슨 시리얼을 골라먹을 것인지를 고민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니, 이래도 되는 것일까” 또는 그와 비슷한 부조리한 느낌 말이다. 이 짧은 장면은 전쟁에서 지옥도를 경험하고 평화 속으로 귀환한 군인이 느끼는 소외감을 람보가 무려 네 편의 영화로 장황하게 설명한 것보다 더 강렬하게 전달해 주었다.
2013년 비글로우 감독은 오사마 빈라덴 추적과정을 그린 <Zero Dark Thirty>를 내놓았지만 반향은 <Hurt Locker>만큼 크지 않았다. zero dark라는 것은 미군 속어로 자정을 가리키는 말이니 이 영화의 제목은 밤 12시 반을 가리킨다. 가공의 인물인 마야 역할을 맡은 배우 제시카 채스틴(Jessica Chastain)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Zero Dark Thirty>의 줄거리는 실화의 주변을 맴돌고 있음에도 <Hurt Locker>만한 흡인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 CIA 여성요원들의 활약에 카메라의 초점을 자주 맞춘 나머지, 비글로우 감독이 페미니즘으로 관심을 돌리나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영화로서의 <Zero Dark Thirty>가 혹평을 받아야 할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그저 전작이 드리운 그늘이 너무 길고 짙었던 것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필자로서는 이 영화가 실화를 소재로 삼고 있다는 점이 못내 찜찜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수필에서 “경험상 실화에 기초한 헐리우드 영화라는 것만큼 수상쩍은 것도 없다”고 쓴 적이 있다. 사람들은 저 영화 속에서 벌어진 일들이 대부분 사실이라고 믿게 될지도 모른다.
빈라덴 사살작전을 거의 혼자 힘으로 성사시킨 CIA의 젊은 여성 요원 같은 것은 실제로 없었는데도 말이다. 굳이 실화를 동원해서 허구에 사실감을 부여하려고 애쓴 영화를 보고 나면 부당하게 속은 것 같은 느낌은 피할 길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