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공 ‘소웨토 봉기’와 일본 가와사키시의 ‘증오연설 금지법’

시위대의 일원인 헥터 피터슨 기념관
소웨토 봉기 시위대의 일원인 헥터 피터슨 기념관 <사진=위키피디아>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소웨토(Soweto) 봉기’가 일어난 지 40주년을 맞았다. ‘소웨토 봉기’는 남아공에서 과거 백인정권의 흑인차별(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정책에 맞선 흑인해방 투쟁을 말한다.

1976년 6월16일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인근 흑인 빈민가 소웨토에서 수천명의 학생들이 17세기 네덜란드계 백인이 이주하면서 전파한 말 ‘아프리칸스(Afrikaans)’語를 강제로 쓰도록 한 백인정권에 대항해 거리행진에 나섰다. 이 언어는 흑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의 상징’으로 족쇄와도 같았다.

‘아파르트헤이트’는 분리 또는 격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남아공의 백인들은 특권을 행사하기 위해 1961년 이후 인종차별 정책을 실시했다. 흑인 거주지를 정해 흑인은 그곳에서만 살도록 제한하였으며, 공공시설 이용에 대한 차별 등 70여종의 인종차별 법규를 만들었다. 남아공은 오랫동안 국제적인 비난과 고립 속에서도 이 정책을 유지해 오다가 1991년에서야 인종차별 정책을 폐지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50여년이 지난 선진국 일본에서 악명 높은 인종차별 혐오 발언 ‘헤이트스피치(hate speech)’ 또는 ‘증오연설(憎惡言說)’이 횡행하고 있다. 특정집단 사람들을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인종차별적 발언을 하여 사회에 증오나 혐오감정을 초래하는 것을 헤이트스피치 또는 증오연설이라고 한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다. 그런데도 우리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다. 반대로 한국에 대한 일본 생각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특정인종을 겨냥한 혐오발언을 의미하는 증오연설이라는 보통명사가 일본에서는 ‘혐한발언(嫌韓發言)’ 혹은 ‘혐한시위(嫌韓示威)’의 동의어로 통하는 신조어로 쓰이고 있다.

또한 증오연설은 올해 일본에서 10대 유행어 가운데 하나로 뽑혔다. 증오연설이 10대 유행어가 된 것은 일본에서 혐한발언이나 혐한시위가 많았음을 의미한다. ‘재일한국인의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회’라는 극우시민단체인 ‘재특회’가 있다.

이들은 도쿄, 오사카 등 코리아타운 일대에서 주말마다 반복적으로 헤이트스피치 활동을 하여 일본 내에서도 논란과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시위 중 한 여고생(15)이 히죽거리며 “죽어라”는 외치는 영상을 접한 일본에서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그 결과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도쿄대행진’에 1200여명이 참여하여 코리아타운 4km 구간을 행진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헤이트스피치 금지법’을 제정하였다.

그럼에도 일본 도심에서 우익세력들의 인종차별적인 ‘증오연설’이 계속 벌어지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에 따라 이의 반대세력도 활동을 강화하고 있다. 양 세력이 지금 물리적인 충돌이 벌일 수 있는 상황이다. 일본 경찰청은 최근 발표한 <치안 회고와 전망>이라는 백서에서 反韓 시위 과정 중 이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와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을 시사했다.

그런데 ‘가와사키시의 결단’이 일어났다. 가와사키(川崎)는 도쿄 도심에서 가깝다. 웬만한 도쿄 외곽에 사는 것보다 더 빨리 도쿄 도심에 갈 수 있다. 그럼에도 집값은 싼 편이다. ‘공단도시’라는 이미지 탓이다. 가와사키 산업사(史)는 일본 근대사와 함께 시작했다. 돈은 도쿄로 갔지만 노동·환경 문제는 기와사키에 남았다.

재일한국인들은 이런 곳에 둥지를 틀었다. 가와사키는 백년 넘게 공단의 부작용과 씨름했다. 그러면서 독특한 도시로 발전했다. 30~40년 전 재일한국인 차별은 한·일 갈등의 뜨거운 이슈였다.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할 때마다 지문을 찍게 한 제도가 차별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1985년 1만명 넘는 재일한국인이 한꺼번에 지문날인을 거부했다. 발칵 뒤집힌 일본은 이걸 힘으로 눌렀다. 일본정부는 사법처리를 공언했다. 먼저 지방관청이 나서 날인 거부자들을 고발했다. 법원도 모두 유죄를 선고했다. 그렇게 살벌한 분위기에서 가와사키시가 홀로 반기를 들었다. 당시 시장이 고발을 거부한 것이다.

가와사키시 시장은 “법과 규칙이 인간애(愛)를 넘어설 수 없다”고 했다. 여론이 움직였다. 결국 8년 뒤 재일한국인 지문날인 제도는 철폐됐다. 가와사키시의 결단이 없었다면 이 악법의 수명은 한참 더 갔을 것이다. 그뿐 아니다. 1996년 가와사키시는 공무원의 국적조항도 앞장서 없앴다. 공무원 문호를 외국인에게도 열었다.

얼마 전 가와사키 시민들이 나서 ‘헤이트스피치’ 시위를 몸으로 막은 사건이 터졌다. 두 아이를 둔, 재일한국인 엄마의 호소에 일본시민들이 움직였다. 가와사키시는 공원에서 시위하겠다는 극우단체 신청을 거절했다. 그러자 시위대가 도로로 나왔다. 이걸 시민이 몸으로 막았다.

그동안 일본 지방관청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극우단체의 공원 집회에 제동을 걸지 않았다. 가와사키시와 시민은 그런 위선과 선을 그었다. 얼마 전 일본은 ‘헤이트스피치 금지법’을 시행했다. 헤이트스피치가 ‘외국인 배제를 선동하는 부당한 차별적 언동’이라고 못 박은 것이다.

하지만 벌칙은 두지 않았다. 법만으로는 시위를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얼마나 많은 관청이 이 법을 앞세워 실제 현장에서 시위를 규제하는가에 성패가 달렸다. 그것을 가와사키시가 선구적으로 나선 것이다. 제도적 차별을 이미 두 차례 무너뜨린 가와사키시와 시장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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