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권의 훈훈한 세상] 어버이날에 ‘아버지의 의자’를 생각하다

[아시아엔=김덕권 원불교문인협회 명예회장] 필자도 자식을 둔 아버지다. 그런데 가정에서 아버지의 위상이 아주 위태롭다. 얼마 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청취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 “당신은 어머니가 더 좋습니까? 아니면 아버지가 더 좋습니까?” 우매한 질문이기는 하지만, 어머니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83.3%, 아버지가 더 좋다는 사람들이 고작 16.7%였다고 한다.

가관인 것은 미국 링컨대학생 5만명에게 질문을 한 결과다. “아버지와 TV중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런데 68%의 학생이 “TV요…” 하고 답을 했다. 어머니와의 비교에서 밀려난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젠 TV에게도 밀리고 있는 것이 아버지의 현실이다.

집안에서 왕 노릇만 하려고 인상 쓰고 폼 잡는 아버지들, 앉았다 하면 텔레비전이나 쳐다보고, 신문이나 뒤적거리고 툭하면 술에 취해 들어와 되지도 않는 말이나 흥얼거리는 아버지들을 ‘부재중인 아버지’라고 한다. 이리 채이고 저리 채는 서글픈 아버지들, 이제 정신 차리고 아버지의 위상을 찾을 때가 아닌가 싶다.

김현승 시인의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가 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울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은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이렇게 세상의 모든 아버지들은 하늘과 같이 거룩한 존재다. 그 하늘이 바로 가정이다. 집이 있기에 사람들은 그 곳에 주소를 두고, 이름을 적을 뿐 아니라,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를 이루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집은 언제나 한 곳에 우뚝 서서 자리를 지킨 채 말이 없는 법이다.

집이 비바람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는 것처럼 아버지도 항상 말없이 사랑과 근심으로 자식들을 돌보고 가족들의 앞날에 대해 걱정한다. 그러기에 아버지는 고독한 존재다. 식구들을 위한 매일의 수고와 삶이라는 무거운 숙제를 풀어야 하는 외로움으로 인해 아버지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언제나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서 겉으로는 태연해 하거나 자신만만한 척하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허무감과 자식들에 대한 걱정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는다. 단순히 아버지로서의 권위 때문에 그러는 게 아니다. 가장으로서 모든 가족들의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아버지는 잠시도 약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렇게 힘겨운 삶의 무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사실 때문에 속으로만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아버지의 깊은 외로움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식들의 올곧은 성장과 순수뿐이다.

비록 세파에 시달리며 힘든 삶을 사는 아버지이지만, 자신의 소망대로 자식들이 순수하고 올바르게 자라나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모든 고독과 노고를 깨끗이 보상받게 된다. 한 연구기관에서 조사한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 아버지들이 자녀와 갖는 대화의 시간이 하루 평균 37초이며, 부부간의 대화시간은 일주일에 평균 24분이라는 연구조사가 있다.

아버지의 역할과 기능을 모르는 아버지들, 자녀의 역할과 기능을 배우지도 못한 자녀들, 한번도 포옹을 경험해보지 못했기에 자녀를 포옹할 줄 모르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어 방황하는 자녀들,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윽박지름과 구타로 아버지와 관계를 맺었기에 자신의 자녀들과 올바른 방법으로 관계를 맺을 줄 모르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로 인해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상처를 간직하고 멀어져가는 우리의 자녀들, 그러나 아버지와 자녀의 올바른 관계는 하나가 되는 관계다. 자녀의 마음이 아버지와 하나가 되도록 하는 일은 무엇보다도 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아버지 마음을 자녀에게로, 또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리는 일은 가정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아버지가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찾고 아버지로서의 기능을 다할 때 비로소 자녀들도 자신의 원위치를 회복할 수 있다. 또한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는 평안과 사랑을 주는 관계다. 자녀들이 평안과 사랑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신분과 역할, 기능은 절대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지금은 아버지의 권위를 회복할 때다. 그 방법은 우선 우리 거실에 ‘아버지의 의자’를 놓는 것이다. 이 의자가 아버지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다. 어머니와 자식들이 이 아버지의 권위의 상징인 아버지의 의자를 만들어 드릴 때 자식들도 어른이 되어 이 서글픈 ‘부재중인 아버지’의 신세를 면할 수 있다.

이 땅의 아버지들이여! 지금이 바로 부재중인 아버지의 신분을 되찾을 때다. 아버지가 자리를 지키고 그 자리의 마땅한 바를 행하면, 우리는 다시는 그런 아픔을 경험하지 않을 것이다. 아버지가 살아야 가정이 산다. 우리의 가정에 모두 ‘아버지의 의자’부터 마련하면 좋겠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