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완의 사색진보] 보수시대의 진보정권, 진보시대의 보수정권
보수의 시대가 있고 진보의 시대가 있다. 보수의 시대는 국민 다수가 보수를 원하는 시대이고 진보의 시대는 국민 다수가 진보를 원하는 시대로 정의될 수 있다. 대개 보수의 시대에는 보수정권이 들어서고 진보의 시대에는 진보정권이 들어선다. 진보정권이 한계를 드러내면 보수의 시대가 오고 보수정권이 들어선다. 역으로 보수정권이 그 할 일을 다하고 바닥을 드러내면 국민들이 진보를 요구하는 진보시대가 오고 진보정권이 들어선다. 역사는 직선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나사못처럼 왼쪽 오른쪽으로 몸을 뒤틀며 앞으로 진전한다. 나선형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따금 이같은 역사발전의 순환이 깨지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 다른 나라의 이야기를 해보자. 노무현이 집권하기 직전 시기에 프랑스에서는 조스펭 총리가 이끄는 사회당 내각이 집권하고 실각했다. 프랑스 국민은 좌파대통령 미테랑의 14년 집권에 지쳐 오른쪽으로 선회할 것을 절실히 요구했다. 미테랑의 임기가 끝날 즈음인 1993년 치러진 의회선거에서 사회당은 우파에 대패했다. 힘있게 집권한 우파정권은 그러나 집권직후부터 국민들에게 점수를 잃었다. 독일과 함께 유럽연합을 이끌고 있던 프랑스는 재정적자를 3% 이내로 맞춰야 한다는 약속을 지켜야했다. 이전의 좌파정부는 세금을 많이 걷고 많이 베풀었으나 시라크 대통령과 쥐페 총리 정부는 세금을 많이 걷고 베풀어주지 못했다.
민심이 돌아서자 1997년 ‘의회해산 조기총선’ 카드를 꺼냈다. 이때 사회당이 승리해서 조스펭 좌파내각이 들어섰다. 프랑스 정치의 스텝이 꼬이기 시작됐다. 우파정부가 요구되는 우파의 시대에 좌파내각이 들어선 것이다. 사회당 내각은 상당부분 우파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경제는 좋아져서 실업률이 한자리 수로 내려갔다. 조스펭의 인기도 한동안 고공행진을 했다. 그러나 2002년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조스펭에게 국민들은 궤멸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1차 선거에서 극우파에게 밀려 3등을 한 것이다. 다음날 조스펭은 정계를 은퇴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좌파가 좌파답지 못하고 우파정책을 쓴 것에 대한 심판이었다.
2002년 조스펭이 패했던 해에 노무현은 대선에서 승리했다. 그런데 참여정부도 조스펭 내각과 같은 운명의 길에 놓여있었다. 노무현은 그의 유저 <진보의 미래>에서 참여정부를 “보수시대의 진보정권이었다”며 괴로워했다. 당시는 국제경제가 호황이었으며 이에 발맞춰 경제발전을 추진해야 할 때였다. 참여정부는 ‘반칙과 특권 없는 사회’ 만들기 기치를 들고 집권했으며 이 부분에 대해서 성과가 있었으나 보수시대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미 FTA 추진, 이라크 파병, 아파트원가 공개 거부, 비정규직 정책 등 보수정책을 채택했다. 진보가 진보답지 못하고 보수를 기웃거렸던 것이다. 결국 조스펭에 이어 노무현도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됐다. 내가 아는 조스펭은 노무현과 같은 연배로 정직하고 고지식한 성정도 비슷했다.?
이제 한국사회는 또다시 전환기에 접어들고 있다. 국민들은 지난 2010년 지방선거부터 뚜렷하게 자신의 의사를 보여주고 있다. 전면적 무상급식과 단계적 무상급식이 맞부딪친 선거에서 매번 전면급식 쪽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전면급식은 유럽에서도 북유럽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찾기 어려운 급진적인 정책이다.?
한나라당은 국민들의 뚜렷한 의사표현에 지난 2년 동안 치러진 선거마다 패배하고 있다. 광역선거에서 대부분의 시도지사 자리를 내주었으며 서울의 25개 구청장 중 21개를 빼앗겼다. 국민들은 보수정권이 싫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이에 놀란 한나라당은 당강령에서 보수를 삭제하려고 했으나 전통보수진영의 반발로 인해 논의가 중단됐다. 그럼에도 여론조사를 해보면 국민 54%가 보수삭제에 찬성했다. 결국 한나라당은 당명을 바꾸었다.
이런 상황은 과거에 이미 보았던 것들이다. 열린우리당도 재보궐선거에서 40전40패 함으로써 당의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국민들이 너무 화끈한 것 아닐까. 강준만 교수는 쏠림현상으로 설명한다. 이 때문에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는 말도 나온다.?
요즈음 국민들이 집권세력에 느끼는 배신감은 이런 것이다. 경제성장과 수출이 잘 되면 아랫목의 온기가 곧 윗목까지 전해올 것이라고 믿었다. 낙수효과니 떡고물이니 하는 말을 믿었지만 그게 허당이란 것을 알게 됐다. 양극화는 더 심해져서 재벌과 대기업 곳간에는 외화가 그득한데 서민생활은 더 어려워졌다. 국민들 다수가 역사상 처음으로 성장보다 분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진보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최근 한 신문의 기사에는 ‘한나라당은 왼쪽으로 민주당은 더 왼쪽으로’ 라는 제목이 붙었다. 선거를 앞두고 표를 먹고 사는 정치권은 진보의 시대 도래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 박근혜는 오래전부터 여론조사에서 1위를 유지하고 있다. 만일 그가 대통령이 된다면 진보시대의 보수대통령이 될 것이다. 노무현이 능동적으로 보수정책을 썼듯이 박근혜는 진보정책을 써야 할 것이다. 그는 벌써부터 당강령을 새로 만들면서 진보적인 색채로 물들이고 있다. 요즘 신문 기사는 한나라당의 좌클릭이 화제다.?
여기서 자크 들로르 이야기를 붙여본다. 다시 지난 1990년대 중반 프랑스의 상황이다. 들로르는 당시 유럽대통령 격인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임기를 성공적으로 마쳐 국민적인 신망이 높았다. 사회당은 인기가 없었지만 사회당 출신 들로르는 여론조사에서 우파의 시라크보다 늘 앞섰다. 이때 대선을 두달 앞두고 들로르는 대선에 나가지 않겠다는 충격 선언을 했다. 그는 우파의 시대에 좌파 대통령이 되면 순조로운 역사의 순항에 장애가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이 장면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필자는 “정치에서는 정권을 획득하는 것이 무조건 선”이라는 세간의 말이 옳지 않음을 알게 됐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교훈을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길이 멀다. 그러나 박근혜가 올해 선거에서 이기면 진보시대의 보수대통령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해야 할 것이다. 보수진영에서 나오는 목소리 중에는 이런 것이 있다. “질 때 지더라도 정체성을 잃지 말고 당당하게 지자. 그래야 다음에 기회가 온다.” 표를 얻기 위해 보수를 벗어던지려는 것은 추하다. 과거 유시민이 했던 말과 한 치도 다르지 않다. 그는 민주당이 품격 있게 지자고 말했다가 패배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
보수가 좌클릭 쇄신하고 강령을 바꾼다고 진보가 되지는 않는다. 국민을 현혹시키는 효과만 있을 뿐이다. 그 결과 진보시대에 보수정권이 들어서면 어떻게 될까. 순조로운 역사발전과 국운의 순항에도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사실을 국민들이 알아야 한다. 조스펭과 노무현에서 보았듯이 시대와 맞지 않는 정권은 정치세력을 불행에 빠뜨리고 국민들도 피곤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