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완의 사색진보] ‘사색진보’는 어떻게 탄생했나
사색진보의 탄생
“가장 특이한 점은 한국에서 진보는 인기있는 정치상품인 반면, 진보와 동의어로 간주되는 좌파는 강력히 터부시된다는 사실이다. ···전문가들은 한국인들이 ‘진보는 좋은 것이고 보수는 나쁜 것’이라는 사고틀을 가진 탓이라고 해석한다.”–좌우파사전?
진보는 좋은 것이지만 좌파는 기피대상이다. 우리 역사의 특별한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보이는 이같은 인식은 진보 논쟁을 둘러싼 혼란의 뿌리이다.?
진보에 대한 선호가 곧바로 좌파에 대한 선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여러 시도가 있었다. 어느 대학의 사회학과 교수가 수강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했더니 진보와 보수 비율이 7대3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좌파와 우파로 설문을 바꿔 물으니 2대8이었다고 한다. 비록 임의적인 데이터이지만 개연성이 있다고 보아 인용한다.?
이 사례를 분석하면 곧 다음과 같은 간단한 결과가 나온다. 자신이 진보이면서 좌파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20%이며, 보수이면서 우파라고 생각한 사람은 30%이다. 그러면 우파이면서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50%라는 계산이 나온다.
진보 70% | 보수 30% |
좌파 20% | 우파 80% |
좌파 진보 20% | 진보 우파 50% | 보수 우파 30% |
문제는 우파이면서 진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실제로 우파인지는 성격이 불명확하지만 적어도 좌파가 아니라는 데에 방점이 찍힌다. 점유율도 전체의 절반에 이른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이들의 내부에는 세가지 다른 종류의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리버럴(liberal)과 어드밴스(advance), 라이트(right)가 그것이다. 리버럴이면서 진보라고 생각하거나 어드밴스이므로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 그리고 보수이면서도 진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보수논객 전원책 변호사는 언론 인터뷰에서 “우리 사회에서 ‘진짜 보수’는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진보라고 스스로 얘기하는 사람 중에 사실은 보수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들이 분노하고 ‘나는 좌파다’라며 보수를 비판하는 쪽에 서 있는 이유는 아까 말한 ‘가짜 보수’가 너무 많기 때문이죠. 저는 우리 사회의 50%가 넘는 대다수가 보수세력이라고 봅니다.” (2012년 1월28일자 주간경향)
여론조사에서 진보나 좌파라고 대답하는 사람들의 숫자 속에 진짜 보수가 숨어있다는 전원책의 발언은 필자가 찾아낸 “우파이면서 진보라고 믿는 사람들 50%”의 실체를 뒷받침해준다.?
두 번째 사례는 보다 과학적인 것으로 위와 같은 결론을 입증하기 위해 찾은 것이다. 한겨레신문은 세종대 사회과학데이터센터에 의뢰해서 국민의 진보-보수 성향에 대해 매년 조사해 발표한다. 지난해 5월15일 발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자신이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30.7%, 중도는 43.9%, 보수는 25.3%로 나타났다.?
그런데 민노당과 진보신당 지지율을 더한 진보정당 지지율은 지난 수년간 5%에서 10%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편의상 평균치를 7.5%로 잡아보자. 그러면 진보지지자 30.7%중 7.5%, 즉 네 명 중 한 명꼴로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명은 어떤 사람인가.?
다른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 위원장의 지지율은?34.7%로, 이념 성향별로 지지율을 나누면 보수층(42.2%) 중도층(35.5%) 진보층(25.7%)이었다. (월드리서치와 윈지코리아컨설팅의 여론조사, 조선일보 2010년 1월14일)?
박근혜 지지자 중 네 명중 한 명이 자신을 진보라고 여기는 셈이다. 어이없는 듯 보이지만 지난 대선에서 이들의 실체가 드러난 바 있다. 이명박후보를 지지하면서 자신이 또는 이후보가 진보라고 믿었던 유권자가 존재함이 밝혀졌다.?
이들은 우파이면서 진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실체를 숫자로 추산해보자. 위의 조사에 따르면 박근혜의 국민 지지율이 34.7%인데 그중 진보는 25.7%이므로 전체국민의 8.9%에 이른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계산을 얻어낼 수 있다. 자칭 진보 30.7%중에 8.9%, 즉 서너 명 중 한 명은 실제로는 우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네 명 중 두 명의 실체는 밝혀졌다.?
그러면 나머지 두 명은 어떤 사람인가. 이들은 리버럴이면서 진보인 사람들이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만 볼수 있는 관행인데 미국의 사회과학서적에서 나타나는 리버럴을 진보라고 번역한다. 이중에는 색깔이 비슷하지만 결이 다른 사람들이 포함돼 있다. 그들은 어드밴스 진보이다. 말 그대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진보라는 뜻이다. 이들은 좌우가 아닌 전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종합하면 아래와 같은 도표가 그려진다.
진보 30.7% | 중도 43.9% | 보수 25.3% |
레프트 7.5% | 리버럴 14.3% (어드밴스 포함) | 라이트 8.9% |
이것은 비록 시론적 차원의 분석이지만 이 연구를 통해 진보이면서 레프트인 사람과 진보이면서 라이트인 사람 그리고 진보이면서 리버럴이거나 어드밴스인 사람들이 존재함을 알수 있다. 필자는 네가지 빛깔의 진보를 ‘사색(四色) 진보’라 이름 붙였다.??
사색진보와 진보전쟁?
16세기 조선시대 선조대 이후 조정의 정치는 노론 소론 남인 북인등 사색(四色) 당파로 나뉘어 당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여러 시대가 지난 뒤 이 땅에 사색당파가 다시 나타났다. 지금의 당파는 모두 저마다 진보를 표방하여 진보전쟁 또는 진보쟁탈전의 양상을 띠고 있다.?
진보는 레프트, 리버럴, 어드밴,스 라이트 등 네가지의 다른 색깔을 띠고 있다. 네가지 중에 각개인이나 각단위 그룹에서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을 진보라고 믿는다. 과학이 아니라 믿음의 차원이다. 이 사상의 신봉자들은 저마다 자기만이 진짜 진보이고 상대편은 짝퉁이라며 서바이벌 게임을 한다. 진보라는 긍정적인 용어로 자신의 생각을 치장할 수 있다면 정치사회적 이득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진보를 사이에 두고 정파간에 다툼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다. 그래서 진보라는 말은 신선하지만 진보를 둘러싼 쟁탈전은 진부하다.?
오늘 저녁에도 대학생 직장인들이 술자리에서 만나면 정치판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때 늘 진보라는 말이 함께 따라온다. 진보는 이 시대 정치 사회문제를 논하는 키워드이다. 그런데 이 말이 공연히 친구들을 다투게 한다. 제각기 다른 함의를 부여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학자 전문가들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어느 대학교수의 칼럼을 보면 진보가 여기저기 박혀있는데 앞에서는 레프트, 중간에는 리버럴, 그뒤에는 어드밴스의 개념이 혼재해 있다. 엄정해야 할 사회과학개념이 이처럼 자의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니 논리전개가 제대로 될 리 만무하다. 진보는 시대적인 딜레마의 자리에 놓여있어서 전문가들도 그 앞에서 쩔쩔맨다. 사색진보는 분열을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현상을 설명함으로써 화해로운 공존을 도모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고 있다.?
이념이란 세계관이다. 사색진보라는 한국적 전형성을 갖는 이념틀의 성공 여부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현상이 얼마나 많은가에 달렸다. 서양의 틀거리인 좌파, 중도좌파, 중도우파, 우파와 얼추 유사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 서양에서는 없는 진보라는 단어를 서로 차지하기 위해 각축전을 벌인다. 언어전쟁이다. 이런 요인은 한국의 이념 대립을 특이하게 만들고 더욱 강퍅하게 만든다.?
노무현은 유저 <진보의 미래>에서 진보 보수를 말하려면 논리나 관념이 아닌 영상적 메시지로, 데이터로, 사례로 말하라고 했다. 그의 가르침을 따르기로 했다. 이론과 논리는 종종 사람을 미망에 빠뜨리기도 하지만 현상은 ‘저산의 소나무’처럼 푸른 생명을 갖는다. 그래서 당대에 현장에서 발생하는 사례들을 연구대상으로 놓았다.?
그러면 왜 자신들만이 진보라고 하는지 사색진보의 주장을 하나하나 따져보자. 네가지 진보의 실체를 밝히기 위해 각각의 진보가 서로 대립 충돌하는 현장을 보여주려고 한다. 현실 속에서 나타나는 사색진보의 대립의 숫자는 리버럴-레프트, 리버럴-어드밴스, 리버럴-라이트, 레프트-라이트, 어드밴스-레프트, 어드밴스-라이트 등 6가지다. 이외에 레프트-레프트 등 몇가지를 추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