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완의 사색진보] 진보-보수는 한국사회 특산품
진보-보수는 한국사회 특산품
한국사회는 뿌리깊은 지역주의로 오랫동안 힘든 시기를 보냈다. 그러나 두 번에 걸쳐 호남이 지지하는 정권이 들어서 이 문제도 크게 완화됐다. 부산에서 민주당 깃발을 들고 지역주의에 맞서 싸웠던 돈키호테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은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제는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은 지역문제에서 이념갈등 문제로 바뀌고 있다. 정치 경제에서 문화 교육계까지 넓고 깊게 진보 보수 갈등이 나타나고 있다. 이 문제는 선진국에서 일반적으로 보이는 갈등이며 그쪽에서 수입된 박래품이면서도 한국사회에서는 유난히 악성적이고 해법을 찾기도 어렵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진보와 진보주의 용어의 모호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전문연구자들 중에 이 용어에 눈여겨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진보가 무엇인가를 접근하기 위해 진보의 반대 개념을 찾아보자. 사전적인 의미에서 그것은 보수가 아니라 퇴보이다. 나치즘이나 스탈린주의 등은 결과적으로 인류에게 해를 끼치고 역사의 발전을 후퇴시킨 이념이었지만 당대에는 다수에 의해 선택된 진보이념이었다. 명목상 퇴보를 지향하는 이념은 있을 수 없다. 모든 이념은 진보를 지향하므로 진보주의는 형식논리상 성립이 불가능하다. 서양의 어떤 사회과학사전에서도 progressivism이 표제어로 나타나지 않으며 단지 progress, the idea of progress만이 보이는 이유이다.
진보주의와 달리 ‘진보’는 사용돼 왔는데 이것도 과학기술 분야에서 주로 나타난다. 독일사민당이 2007년 함부르크에서 채택한 기본강령에 진보는 보이지만 진보주의는 단 한차례도 나타나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진보가 인류의 기억에 자리잡게 된 것은 마르크스의 “역사는 진보한다”라는 선언이다. 마르크스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따라 원시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그리고 사회주의로 진전하는 것을 진보라 했다. 일설에는 한국에서 좌파를 대체하는 진보의 기원은 마르크스의 이같은 언명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한다. 현대에 와서는 미국에서 오바마의 싱크탱크 역할을 한 프로그레스센터라는 용어가 발견된다.
한국사회에서 진보주의 탄생의 비밀을 먼저 찾아보자. 80년대 치열했던 사회운동과 사상투쟁의 성과로 전쟁후 절멸됐던 좌파가 복원됐다. 그런데 제도권 언론이 국민들에게 이들을 가리켜 좌익 좌파라고 지칭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대용품이 필요하게 됐다. 그래서 90년대 이후 진보-보수라는 용어의 조합이 징발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들이 일치된 의견을 표하고 있다.
보수주의는 영국에서 탄생해 미국에서 주로 사용돼 온 것으로 프랑스 독일등에서는 사용되지 않는다. 또한 지키고 간직할 것이 적은 제3세계 나라들에서는 보수주의 존립 자체가 어렵다. 한국에서도 일제식민지와 전쟁등으로 전통적 가치가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다. 그러면 한국의 보수주의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일본과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사용되는 것은 미국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우익 우파의 대용품으로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진보-보수는 한국사회의 특산품이다. 세계 어느나라에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좌파-우파, 미국 영국에서는 리버럴-보수주의 그리고 일본은 미국의 것이 수입돼 사용되고 있다. 한국도 일본처럼 미국의 것이 수입되기는 마찬가지이나 어떤 필요에 의해 리버럴이 진보라는 말로 대치됐다.
매년 미국과 유럽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학 등 인문사회과학 박사학위를 받고 들어온다. 그런데 이들은 진보주의에 대해서 고개를 갸우뚱한다. 미국 유럽에서 듣도 보도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글에서 따져보려 한다.
이념은 세상을 쉽게 이해하고 편리하게 재단하는 도구였다. 지난 200년간 인류 지성이 집약돼 있으며 수많은 실험을 거치며 견고해진 선대가 남긴 선물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남북 간의 이념전쟁을 겪으며 재앙이 됐다. 이 문제를 풀어내지 않고는 우리의 멘탈리티가 편안해질 수가 없다.
진보라는 말에는 한국사회의 혼란의 가닥들이 난마와 같이 뒤엉켜 있어서 도무지 그 뜻이 분명하게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진보에 얽힌 비밀을 풀 수 있다면 세상 혼란의 상당부분을 해결하는 종결자가 될 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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