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완의 사색진보] 유시민과 노회찬의 봉숭아학당

리버럴과 레프트의 충돌

지난해 3월 진보통합 주최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노회찬 진보신당 전대표는 옆자리에 앉은 유시민 당시 국민참여당 연구원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같이 하려면 좌클릭해서 진보쪽으로 오시오.” 그러자 유시민 원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진보인데요?”

필자는 이 장면을 오마이뉴스 동영상으로 지켜보다가 좀 과장해서 말하면 현기증이 일어났다. 진보의 재구성이라는 더없이 중요한 논의를 하는 자리에서 마치 봉숭아학당같은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노회찬은 진보를 레프트라고 여기고 말했던 것인데 유시민은 진보를 리버럴이라고 보고 말한 것이다.

리버럴과 레프트는 지난 한 해 동안 근래 보기 드문 격렬한 충돌 사례들을 만들어냈다. 좌파정당인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의 통합에 리버럴 정당인 국민참여당이 끼워달라고 했는데 좌파진영의 정치인들뿐 아니라 학자 연구자들도 불가하다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색진보에 착안하게 된 계기를 만들어준 것도 위의 봉숭아학당이었다.

유시민, 네가 진보냐

노회찬과 유시민은 세미나장에서 서로가 진보라는 엇갈린 동시패션을 연출했는데 워낙 순간적으로 나타난 일이어서 본인들도 심각하게 느끼지 못했을 수 있다. 이 충돌은 리버럴인 유시민에 대해 레프트의 이데올로그인 김세균 서울대 교수, 손호철 서강대 교수 등이 투톱의 공격수로 나서서 집요하게 공격을 가함으로써 보다 확실해졌다.

이 두 사람은 주로 프레시안 기고글을 통해 발언했다. 김세균은 유시민에 대해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로서 진보성을 띄지만 실질적 민주주의 측면에서 그는 진보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며 복지와 관련된 그의 정치경제 철학은 민주당보다 더 우경화된 노선이라 비판했다. 그는 또 “(민노당 참여당의 통합안이 통과되면) 역사상 유례없는 희대의 기형아를 낳을 것이며 스스로 진보정치를 안락사 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고 강하게 반대했다.

손호철은 “국민참여당은 단순한 정치공학적 이유 때문에 이념적으로 거리가 너무도 먼 진보정당들에 추파를 던질 것이 아니라 이념적으로 훨씬 가까운 민주당과 통합을 추구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했다. 이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유시민, 네가 진보냐”라고 묻는다.

국민참여당의 진보정당 진입에 반대하는 연구자들의 목소리는 지난 한해 계속됐다. 진보정치 발전을 위한 경남지역 교수모임 소속인 경남지역 대학교수 82명은 8월4일 기자회견을 열어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국민참여당과의 진보정당 추진은 그만둬야 한다”며 “자유주의정당인 국민참여당은 진정한 진보정당이라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들 역시 김세균, 손호철처럼 좌파만을 진보라고 인정하는 학자들이다. 필자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들이 읽고 가르치는 영미의 사회과학 서적에서 리버럴이 진보라고 번역돼 있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가. 파주출판단지에 모여서 자유주의를 진보주의라고 번역하는 출판사들에 시정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닐까.

리버럴을 진보로 번역하는 출판계 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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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가 무어냐 했을 때 우리사회 통념상 좌파라는 의견이 가장 많은 지분을 갖고 있다. 레프트와 리버럴 간의 충돌이 많은 주요한 이유는 미국의 영향 때문이다. 리버럴과 보수로 나뉘어져 있는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이 틀을 자연스레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영향과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한국의 출판계에는 리버럴 번역과 관련한 특별한 관행이 있다. 대부분의 사회과학서적에서 리버럴을 자유가 아니라 진보로, 리버럴리즘은 진보주의로 번역한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런 번역 관행은 진보를 둘러싼 여러 혼란을 재생산하는 엔진역할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진보 논란은 언어 문제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재출간된 조지 레이코프의 <도덕, 정치를 말하다>라는 책에는 진보라는 말이 셀 수 없이 여러 번 나타난다. 리버럴을 번역한 것이다. 그렇다면 정작 ‘프로그레스(progress)’는 어떻게 번역했을까. 역자 손대오씨에게 직접 물어볼 기회가 있었다. 손씨는 이 단어는 이 두꺼운 책에서 한두 번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알게 된다. 서양의 사회과학계에서 프로그레시비즘(progressivism)이란 말은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프로그레스는 과학기술계에서 주로 사용한다는 사실이다.

폴 크르구먼의 저서 <미래를 말한다>의 역자들은 ‘옮긴이의 글’에서 자유주의를 진보주의로 번역하면서 겪은 고민을 털어놓았다. 영어로 진보주의라는 말이 따로 있으니 이건 오역에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누구도 이 오역에 대해서 문제삼지 않는다. 진보주의 연구에 집중했던 노무현 전대통령도 이 문제에 포착했다. “진보주의와 자유주의가 자꾸 혼동이 되고 미국에서는 영어로 ‘자유주의(liberalism)’라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진보주의’로 번역한 것도 있고, 진짜 진보주의와 자유주의, 자유주의와 보수주의의 이 관계들을 잘 한번 정리해 봤으면 좋겠고요.”-<진보의 미래>

김규항 진중권 논쟁은 두 번째 봉숭아 학당

리버럴과 레프트가 서로 자기가 진보라고 우기는 어찌 보면 한심스러운 논쟁은 진보통합 과정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2011년 3월 ‘김규항-진중권’의 논쟁도 똑같은 성격을 띤다. 조국 서울대교수와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의 저서 제목 <진보집권플랜>에 시비가 걸렸다. 이들이 말한 정권교체의 주체는 민노당이 아니라 민주당이므로 즉 진보세력이 아니라 시민세력이므로 “시민집권플랜”이라고 해야 맞다는 주장이다.?

좌파 논객 김규항이 제기한 이 주장에 대해서 문화평론가 진중권은 ‘진보’를 좌파가 독점하지 말라고 반격했다. 이 논쟁의 구조는 소아적인 다툼 수준이다. 진보가 서로 자기 것이라며 할퀴고 싸운다. 진보라는 단어에 숨은 비밀을 꿰뚫어보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농락당하고 있는 듯해 당대 최고수의 논객들이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노회찬-유시민’이 연출한 봉숭아학당의 두 번째 버전이다.

좌파와 자유주의 세력 간 이념갈등이 주의, 주장 등 그 내용의 충돌에서 오는 것이라면 혼란스럽더라도 마땅히 감수해야 한다. 그러나 그런 문제는 여기서는 논외이다. 어찌 보면 진보라는 용어를 매개로 터져나오는 갈등이 더 심각하다. 이념적 차이로 인한 쟁투가 아니라 진보라는 용어를 선점하기 위해 다툰다.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언어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국어연구원이 나서서 조정을 해주어야 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닐까. 다른 나라에서 유사 사례를 찾을 수 없는 한국사회 특산 논쟁이다. 그들이 진보 쟁탈전을 통해서 차지하려는 것은 진보의 개념이 아니라 진보라는 ‘아름다운’ 말이다. 진보라는 칭호를 얻어서 진보의 고지에 올라서야만 정치적으로 우위에 서기 때문이다.

김진석의 부풀려진 진보와 좁혀진 진보

이처럼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을 찾기 어려운 터에 김진석 인하대 교수가 나섰다. 그는 지난해 출간된 저서 <우충좌돌 중도의 재발견>에 실려 있는 ‘부풀려진 진보와 좁혀진 진보’에서 진보의 모호성과 자의성을 지적하는 연구를 했다. 그는 몇 해 전부터 우충좌돌을 통해 우파와 좌파, 보수와 진보 양쪽을 모두 치받고 중도의 길을 넓혀가겠다고 말해왔다. 그런데 진보 쪽을 치받다가 우리사회의 진보 규정에 자의성이 있음을 포착한다.

그의 말의 골자는 이런 것이다. 한국의 진보진영에는 좌파와 리버럴이 포함돼 있는데 필요에 따라 두 가지를 모두 진보라고 말하기도 하고 좌파만을 진보라고 말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즉 진보의 범위를 부풀리기도 하고 좁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진보의 혼돈에 대한 연구를 찾아보기 어려운 지식계에서 이 같은 언급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현상에만 머물러 핵심에 이르지 못한 것이 아닐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부풀려진 진보와 좁혀진 진보를 연출하고 선택하는 주체가 누구인가. 사색진보의 경우에는 각각의 세력이 진보를 쟁취하려는 이유와 목적이 분명한데 비해 김진석의 지적에는 그 주체가 불분명하다. 필자가 보기에는 부풀려진 진보와 좁혀진 진보의 선택과정에는 어떤 정치세력의 의도나 일관된 규칙성이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 사회의 지적 혼돈의 산물일 뿐이다. 그저 편의적 자의적으로 확대된 의미와 축소된 의미가 사용될 뿐이다. 리버럴을 진보로 보다가 레프트를 진보로 보다가 어느 때는 두 가지 모두 진보로 보는 것에는 규칙성이 발견되지 않는다.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서 사용한 다음 걷어차 버리는 사다리와 같다. 그래서 문학적 수식어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그는 여전히 진보를 좌파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는 2011년 2월 한국일보 기고 칼럼 “진보이념 뒤에 숨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최근 ‘진보가 집권해야 한다’는 구호를 내거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모든 구호에서, ‘진보’라는 말은 극심한 오해와 왜곡을 조장하고 있다. ‘진보’라고 자칭하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사실 진보라기보다는 중도좌파 혹은 ‘리버럴(liberal)’에 가깝다. 그런데 그들은 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지 않고 ‘진보’라 자칭할까? 일종의 ‘진보 인플레이션’이다.”

이 글에서 자신이 말한 ‘좁혀진 진보’의 관점이 어떤 것인지를 실천적으로 보여준다. 진보의 규정을 레프트로 좁히면 리버럴은 진보가 아닌 것이 된다. 레프트와 리버럴 그리고 진보의 관계가 정리돼 있지는 않지만 이것들 사이에는 뿌리 깊은 혼돈이 숨어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그것의 일단을 드러내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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