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60대 노부부의 회상 “여보 미안하오”

[아시아엔=김중겸 전 인터폴 부총재, 전 충남경찰청장] 차편이 거의 없던 시절에 독립문 고개를 넘어가면 문화촌이 나왔다. 더 넘어가면 논밭이 나오고. 누나뻘의 버스 차장 아가씨가 외친다. “문화촌입니다, 다음은 문화촌!”

충남 장항에서와 같은 문화주택이 거기 늘어서 있었다. 그 스타일이 그 문화였다. 문화가 철학 아니란 걸 알려준다. 문화는 실용(pragmatism)이었다.

내가 당시 살던 곳은 이화동이었다. 문화촌 말고도 북촌에 문화주택이 있다는 소린 들었다. 1920년대 부자들이 짓고 살았다 했지만 가보지는 못했다.

우리 집은 일본식 목조 2층이었다. 아래에 방 둘과 부엌, 위에는 큰 다다미방이 있었다. 내 방이었다. 독차지하며 뒹굴었다. 전기가 귀했다. 전등을 늦게까지 켜지 못했다. 그게 불편하거나 부족하다는 느낌은 없었다.

근처에 이승만 대통령이 거처하던 이화장이 있어 자주 기웃거렸다. 나무와 꽃이 많았다. 새 소리가 아름다웠다.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는 청소하며 노래를 부르셨다. ‘산장의 여인’. 어머니 목소리는 청아했다.

“아무도 날 찾는 이 없는 외로운 이 산장에/단풍잎만 채곡채곡 떨어져 쌓여 있네.” 권혜경씨가 불렀다. 일대 선풍을 끌었다.

그 노래로 인해 카바레에 아줌마들이 몰려든다 했다. 장 보러 시장가는 양 장바구니 들고 댄스홀에 장사진을 쳤다. 신문에 연재된 자유부인 스타일도 유행이었다. 이런 저런 풍문(風聞)과 유언(流言)을 듣던 터라 나도 ‘우리 어머니께서 바람나셨나’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서울 서대문 동양극장은 개봉영화관이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아버지 어머니 따라가 구경했던 기억이 어제 일 같다. 국극 <호동왕자와 낙랑공주>도 졸졸 따라가 봤다. 동대문시장 장보러 가실 때 어머니 손잡고 가서 순대 먹은 일도 있다. 내 어린 날 행복이었다.

어머니의 행복은? 식모 제켜두고 직접 엎드려서 물걸레질 하던 그 시절 그때였던 거 같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무렵이다. 살림만 하셨다. 인생에 걱정거리 없을 적이 있겠나. 그러나 아들은 느꼈다. 어머니는 최고로 행복하셨을 거라고.

부모님 두분이 앉아 계시면 그 닮은꼴 우유 빛 피부, 그리고 말수가 없으시고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다. 흰 식기에 은수저, 그때가 절정이었다. 그리고는 어머니께서는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다.

짧았던 마이 홈 ‘한때’···경찰 간부 부인의 고달픈 삶

내 생애 최초 내 이름으로 등기된 집 우리 가족 소유의 ‘마이 홈’은 새 집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이름이 문화아파트였다. 기분 좋았다. 집사람 빨래 거는 폼이 날아갈 듯했다. 아이들도 얼굴이 참 화~안~했다. 내가 가장 노릇하는 느낌이다. 문화란 글자가 들어간 집은 기실 지나가다 보기만 했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내 팔아야 했다.

그 이후 아내가 고생길 들어섰다. 면하는데 10년이 걸렸다. 며칠 전 절에 다녀오는 길, 25년이 넘은 이제사 그때 일을 풀어놓는다. 내가 조심조심 물어봐야 조용조용 얘기가 나온다.

그 당시 어느날 이른 새벽, 양 손에 물건 들고 버스를 타려는데 차가 출발했다. 한발이 문에 낀 채 질질 끌려가기도 했다. 도매 물건 떼러 간 사이 도둑이 들었다. 유리창이 깨지고 가게는 난장판이 됐다. 늘 기회를 엿보는 동네 불량배. 아침에 번 돈 아이들 속여 몽땅 훔쳐간 사기꾼. 겪은 일들로 아내의 심신은 지칠 대로 지쳤다.

한푼 아끼려 그리도 노력했다. 요즈음 아내가 자주 병나는 원인이 바로 그 10년간 고생에 있었던 거다. 나는 두푼 썼다. 물정에도 어둡다. 그러고도 집사람 말 잘 안 듣는다. 지금인들 어디 다르랴.

낙제나 면하려나···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없으면 주눅 들고 기 펴지 못한다. 뭘 사려다가도 움츠린다. 필요한데도 돌아서고 만다. 그런 모습 보면서 느끼는 자괴감, 공무원 왜 했지? 그동안 뭐 했어? 깨끗하게 했다구? 그게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슨 도움이 됐냐? 스스로 묻는다.

서울이 움직이면 전국이 약동한다. 서울이 흔들거리면 지방이 비틀거린다. 그런 서울에 살게 하려 하셨든 아버지 의지와 어머니의 꿈이 나를 서울까지 데려다 놓으셨다. 하지만 이 아들은 그걸 완성하지 못했다.

누가 근로피해보상으로 5백억 소송 냈다던데, 식구들 고생 시킨 거 따진다면 나는 더 될 거 같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려야겠다. 인생 낙제 면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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