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김광석을 괴롭힌 이유
짧은 만남, 긴 여운···집 떠나와 열차타고 하늘나라 간 김광석
[아시아엔=박문영 ‘독도는 우리땅’ 원작자, 전 KBS PD] 나는 자백한다. 나는 김광석을 괴롭혔다. 그 이유를 지금부터 밝힐 것이다. 말이 되는지 판단해 주기 바란다.
그는 생전 방송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했다. 가장 부르기 괴로운 노래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랑했지만’이라고. 그는 ‘사랑했지만’을 라이브 무대에서도 잘 부르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나는 안다. 아마 그 노래를 부르기 괴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음정이 높아서도, 노래가 어려워서도 아니다. 그 노래를 불러야 하는 시절이 그에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고통 한 가운데서 아마 내가 있었을 것이다. 미안하다. 그래, 나는 악마다. 빨간 모자를 쓴 유격장 악질조교보다 더 했을 것이다. 혹시 군대에서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잊지 마시라. 빨간 모자보다 열배 백배 당신을 괴롭히려는 인간이 당신의 제대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 지금 군대에 계시는 빨간 모자에게 잘 대하셔야 할 것이다. 그 분에게 무례하게 대하는 것은 마치 예방주사를 놓는 의사선생님한테 마구 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짓이라고.
나는 김광석에게 잔인하게 대했다. 절대로 용서가 없었다. 그가, 아니 ‘노래의 신’ 김광석이 나에게 온 것은 88올림픽이 막 시작할 무렵이었다. 대학생그룹 동물원의 멤버로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라는 명곡을 김광석은 도입부에서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솔로로 노래를 하다시피 했다. 그에게는 처음으로 그룹의 보컬을 책임지고 노래를 불렀던 곡이다. 그의 목소리는 불안하고 우울하고 김광석 특유의 의문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불안한 음정은 그의 천재같은 동료들이 “우~” 하는 코러스로 받쳐주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음정이 불안해서 더욱 아름다운 곡이었다. 지금 이 노래에 대하여 회상하며 글을 쓰고 있는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기 바란다. 나도 이 노래를 듣던 그 때, 심하게 마음의 갈등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같이 술도 먹고 수다도 떨고 불안한 인생에 대하여 많은 이야기를 했던 시절. 다시 돌아올 수는 없겠지.
나는 그 당시 라디오 심야프로의 PD를 맡고 있었다. ‘밤을 잊은 그대에게…’ 딱 어울리는 곡이었다. 그 노래의 인기에 용기를 얻었는지 그는 의논도 없이 몇달 후, 몰래 솔로 앨범을 제작해서 가져왔다. 열심히 음반에 실린 곡을 다 들었다. 결론은 ‘부적합’이었다. 부적합이란 뜻은 ‘음정불안’ ‘자신감 결여’ 등…. 당대의 노래의 신에게 무슨 망발이냐고 물으신다면 할 말 없지만 기라성 같은 노래 선수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던 때라 그가 솔로로 설 자리는 없었다. ‘노래의 신’에게도 이런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증언한다. 나는 속으로 ‘그냥 계속 그룹활동을 했다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했다. 믿고 있었던 PD가 잘 도와주지 않자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그가 나를 찾아왔다. 엄청난 용기를 냈을테지. 나는 그가 무슨 이유로 왔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 좀 도와주십시오….” 이 녀석이 감히 PD 선생님한테 선배라고라? “내가 왜 네 선배냐?” “저 실은 고등학교 후뱁니다!” “뭐라고?” 나는 사적인 인맥 청탁을 극히 싫어하는 사람인데 그가 나에게 청탁을 넣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이 너무나 순수하고 해맑게 빛나보였다. 내가 정실에 무너지고 있는 건가? 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야, 임마! 그럼 진작 얘기를 하지….” 미소를 띠는 그의 얼굴에다 대고 나는 잔인한 말을 내뱉고 있었다. “너 임마 잘 걸렸다! 오늘부터 죽었다!”
나는 그 날 이후로 그를 훈련시키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솔로로서 기본 기량을 닦아야 했다. “너 비틀즈 곡 열 곡 연습해서 다음주 일요일날 여학생들 앞에서 공개방송 한다! 이의 없지? 실시!” “어, 예….”
그가 엉겁결에 대답을 하고 돌아갔다. 나는 속으로 그가 일주일동안 어떻게 고통을 당할지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20대 초반, 통기타 가수로 데뷔하기 위하여 백일을 합숙훈련 한 적이 있었다. 하루 20시간 동안 노래만 불렀다. 노래를 좋아하긴 했지만 지옥 같은 나날이었다. 한달을 그렇게 부르니까 목소리의 힘이 예전과는 달랐다. 엄청나게 강하게 나왔다. 그렇게 6개월을 연습하고 종로에 있는 쉘부르 무대에 나갔다. 물론 전에도 KBS노래자랑에서 주말톱싱어 우승가수로 가창력을 인정받았지만 그건 아마추어 무대였고 프로무대는 완전 다르다. 훈련을 마치고 무대에 선 나는 관객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다 쳐다보며 여유 있고 편안하게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 그 이후 ‘논두렁밭두렁’으로 데뷔하여 가요계 최상위권 까지 진출 할 수 있었다.
김광석에게 솔로로서 갖춰야 할 목소리 파워와 기타실력을 훈련시켜야 정글 같은 가요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 것이다. 매주 숙제와 고통과 평가가 뒤따랐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통스러우면 관두면 되는 것이다. 누가 하라고 했나? 자기가 원해서 하는 건데….
이대로 두면 그가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나는 한 가지 계략을 생각해냈다. 손자병법 36계중 제 31계를 쓰기로 했다. 라디오 공개방송에서 노래를 계속하던 신인가수 김광석에게도 팬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라디오의 공개방송이란 20여명의 여학생들을 초대하여 노래를 하는 자리다. 바로 코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가수의 숨소리, 콧소리까지 다 노출되는 그런 자리다. 여학생들 코앞에서 노래를 부를 때마다 김광석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고 있었다. 여학생들이 바로 코앞에 있다! 끓어오르는 청춘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공개방송이 끝나고 어느날, 김광석이 어느 여학생에게 무언가를 받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말로만 듣던 팬레터였다. 공개방송 맨 앞에서 김광석의 입속까지 들여다보며 좋아하던, 예쁘게 생긴 한 여학생이 그에게 팬레터를 보낸 것이다. 허겁지겁 방송국을 빠져나가려던 그를 불러 세웠다. “야, 광석아! 뭐니?” “아무 것도 아닌데요?” “어? 그래? 아니면 이리 좀 와 봐!” 마지못해 다가온 그가 주머니에서 쭈뼛쭈뼛 꺼낸 것은 예쁜 편지였다.
“오! 이거 팬레터구나!” “아, 예…. 누가 주던데요?” “드디어 팬 생겼네? 축하한다! 다음주에 보자.”
여학생에게 받은 첫 팬레터가 그의 마음을 얼마나 설레게 했는지 나는 안다. 집에 가서 연습할 때마다 얼마나 많이 읽었을까? 그렇게 고통과 환희의 세월동안 그는 2집 노래들을 준비했다. 2집 노래의 대표곡이 ‘사랑했지만’이다. 살을 애는 고통과 나의 잔인함이 만들어 낸 그의 목소리는 이전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강하고 부드러웠다. 아니, 부드럽고 강했다. 솔로 가수로서 갖춰야 할 라이브 실력과 팬들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목소리를 내지르는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진주가 되어가고 있었다.
고통과 환희에 가득 찬 ‘사랑했지만’은 그렇게 완성되었다. 담겨 있는 99%는 고통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주고 싶어서 나는 그 날, 한 여학생에게 펜과 종이를 주고 받아 부르게 해서 그에게 팬이라고 하며 팬레터를 전달하도록 심부름을 시킨 것이다. 그렇다. 제 31계는 미인계였다. 그에게는 아직까지 비밀이지만 고백할 기회가 없어져서 안타깝다.
살면서 CD 한장 쯤 마르고닳도록 들어야 한다면 나는 김광석의 CD를 추천한다. 그의 노래가 다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목소리에는 우수와 어물어물함과 의심이 가득 차 있다. 우리 인생도 우수와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 그래서 그의 노래가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 우리 인생을 가장 잘 위로해주기 때문이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로 가는 날, 부모님께 큰절하고 대문 밖을 나설 때, 가슴 속에 무엇인가 아쉬움이 남지만,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