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 직필] “윤병세 장관, 갑신정변 들여다보며 제발 정신 좀···”

일본은 갑신정변을 이용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사후처리에는 능숙하였다. 징용자도 포함된 일본의 근대화의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른다고 한다. 최근 우리 외무부는 일본 외무성에 거의 백전백패다. 대통령이 기분 좋을 해외방문 이벤트나 구상하고 연출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정신 차리기 위해서는 텐진조약이 일본 외교의 승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먼저다. 당시 외상은 이노우에 가오루, 총리는 이토오 히로부미 등 이들 모두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을 일으킨 핵심이었다. 일본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인재’ 들을 동원하였다. 현재 한국 외교부의 수준은 최하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1884년 청불전쟁이 발생하자, 김옥균 등의 개화파는 이를 청의 간섭을 배격할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일본 공사 다케소에는 김옥균 등에게 일본군을 동원하여 적극적으로 원조할 것을 약속하였다. 개화파는 우정국의 개국축하연에 안국동 별궁에 방화 후 수구파 대신을 처치하고, 궁궐로 들어가서 청군이 변을 일으켰다고 고종에게 거짓 고하면서 일본군의 호위를 청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이 공포되기도 전에 그들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청군이 출동하였기 때문이다. 다케소에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일부는 철퇴하였으나 아직도 1500명이나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을 두고, 200명의 일군을 믿고 일을 시작한 것은 애초부터 오산이었다.

그러함에도 일본은 이 정변을 계기로 청의 조선 지배권을 약화시키려 하였다. 이토오 히로부미는 리홍장과 회담하여 청일 양국이 철퇴할 것과, 장차 파병할 때에는 사전에 통고할 것을 약정하는 텐진조약을 맺었다. 이것은 일본 외교의 일대 승리였다. 사단(事端)은 일본의 부당한 내정간섭으로 시작된 것이고, 일군은 청군에 의해 패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텐진조약을 통하여 청과 동일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이다.

서재필, 김옥균 등의 거사는 성급한 것이었다. 그들은 정권을 뒤엎는 엄청난 일에 대해 준비가 턱없이 부족했다. 다케소에 공사도 서툴렀다. 청군은 임오군란 진압을 통해 조선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들이 출동할 가능성은 농후했는데도 이에 대한 대비가 없었다.

정변 후 20대의 위안스카이(원세개)는 서울에 남아 다루가치와 같은 행세를 하였다. 그는 서울 요지에 제멋대로 줄을 치고 상인을 불러들여 중국인가를 형성하였다. 지금 명동의 금싸라기 땅 중국대사관 일대는 그때의 치욕의 유산이다.

일본은 갑신정변을 이용하는 데는 실패하였으나, 사후처리에는 능숙하였다. 징용자도 포함된 일본의 근대화의 유산이 세계문화유산에 오른다고 한다. 최근 우리 외무부는 일본 외무성에 거의 백전백패다. 대통령이 기분 좋을 해외방문 이벤트나 구상하고 연출하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정신 차리기 위해서는 텐진조약이 일본 외교의 승리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이 먼저다. 당시 외상은 이노우에 가오루, 총리는 이토오 히로부미 등 이들 모두 메이지유신(명치유신)을 일으킨 핵심이었다. 일본은 ‘동원할 수 있는 최고의 인재’ 들을 동원하였다. 현재 한국 외교부의 수준은 최하다. 그 책임은 물론, 최종적으로 chief diplomat인 대통령에 있다.

갑신정변은 실패한 쿠데타다. 최근 5.16을 준비, 시행하는데 김종필(JP)의 역할에 대한 회고가 연재되고 있다. 한 나라를 구상했던 청년장교의 의기와 발상이 담겨져 있다. 5.16에 서 박정희 없는 김종필은 있을 수 없지만, 김종필 없는 박정희도 있을 수 없었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5.16이 군사정변으로 시작했으나 산업화를 이룬 국민혁명으로 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충분히 준비되어 있는 주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청년들은 많은 공부를 해야 했다. 집권층과 함께 청년들도 턱없이 부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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