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국헌의 직필] 미국이 한국에 빚진 것들

[아시아엔=김국헌 전 국방부 정책기획관] 한국군의 베트남전 참전은 산업화에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이것은 국가차원의 거시적(macro)인 것이고 미시적(micro) 차원에서는 가정의 살림살이가 펴졌다.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갖게 된 것이 이때부터다. 지금 군인도 두 달에 한 번씩 보너스를 받지만, 그전에는 봉급이 전부였다. 장교는 베트남에 다녀와야 살만해졌다. 군인은 실전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명분은 거창한 것이고, 그 실질은 달러로 받는 봉급이었다.

국민들은 미국이 한국을 지켜준다고 흔히 생각하지만 한국이 미국을 도와주었다는 점은 간과하고 있다. 한국은 연 30만명에 달하는 병력을 베트남에 보냈다. 베트남전은 한국전과 달리 미국에서 인기 없는 전쟁이었다. 한때 50만명에 달하던 미군이 베트남전에서 성공하지 못한 것도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제인 폰다 등 반전데모에 나섰던 유명인사들은 히피, 마약과 함께 1960년대 미국의 어두운 구석을 상징한다. 이런 가운데서 한국군의 참전은 미국에 천군만마가 되었다. 한국에 이어 호주, 뉴질랜드가 뒤를 이었다. 1966년 마닐라에서 베트남 참전 7개국 정상이 모였을 때 존슨 대통령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예우는 극진하였다. 존슨은 박대통령이 기조연설을 하게끔 배려까지 하였다.

베트남전 파병을 두고 박정희 대통령이 고뇌하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대동아전쟁,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박정희는 전쟁은 비참한 것이며 희생은 불가피하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 그것 말고도 국군이 베트남전에서 성공할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이 한국전에 참전하며 고심을 거듭하던 것과 같다. 그런데 베트남전에 참전한 맹호부대는 자타가 경악할 정도로 용전분투하였다. 두코전투, 짜빈동전투는 신화가 되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군에게 배운 한국군이 이제는 미군을 가르치는 형상이 되었다.

베트남전에서 국군이 성공하였던 가장 주요한 요소는 주장(主將) 채명신 장군이 탁월하였기 때문이다. 채명신 장군의 전술은 중대전술기지로 집약된다. 어디에도 있고, 아무 데에도 없는 베트콩을 찾아서 헤매는 것이 아니라, 베트콩이 모여들도록 유도하여 잘 준비된 기지에서 소모되도록 하는 중대기지 전술은 베트콩을 찾아 격파한다는(seek and destroy) 미군의 전술과 완전히 다른 전술이었다. 또한 잘 방호된 기지를 중심으로 하여 민사심리전으로 주민 마음을 산다는 것은 대유격전의 진수였다. 채명신 장군을 맹호 사단장으로 선정한 것은 통수권자로서 박정희의 탁월한 선택이었다.

러일전쟁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명성은 잘 알려져 있지만 도고를 연합함대사령장관으로 발탁한 해군대신 야마모도 겐베에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장교는 많지 않다. 야마모도가 도고를 고른 이유는 “도고는 왠지 모르게 운이 좋다”는 것이었다. 군정가로서 야마모도의 탁월함은 이것 말고도 워싱턴 해군 군축회의에서 일본의 국력에 맞는 해군력 즉, 미, 영, 일의 5대5대3을 받아들였다는데 있다. 그는 군인으로서는 좀처럼 하기 힘든 판단을 내렸고, 이를 만난을 무릅쓰고 관철해 내었는데 야마모도 겐베에는 실로 도조 히데키 같은 용장(庸將)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명장이었다. 박정희와 채명신의 조합은 가히 야마모도와 도고의 조합을 생각나게 한다. 통수권자로서 대통령이 해야 될 것, 대통령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이것 하나다.

미국이 한국을 신뢰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대통령과 장군이다.

 

Leave a Rep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