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란코프 칼럼] 북한 주민도 미국드라마 본다

지난 6월 북한 원산에 있는 한 해변가에서 북한주민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사진=AP>

혹자는 현대문명이 여가와 유흥에 지나친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적인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역사가들도 있다. 산업화 이전 시대 사람들은 지금보다 가난했지만, 여가를 즐길 수 있었다.

요즘 북한사람들은 여가를 어떻게 보낼까? 평양 등 대도시가 아닌 소도시나 농촌 주민들은 과연 무엇을 하면 남는 시간을 보낼까?

일반적으로 북한주민들은 기술부족과 정부의 금지조치 등으로 맘놓고 즐길 수 있는 오락이 거의 없다.

외국인이 투숙하는 호텔 등에는 이와 유사한 시설이나 장비 등이 있지만, 북한에 나이트클럽이 있다는 얘기는 들은 바 없다. 물론 축제같은 자리에선 거기 어울리는 의상을 입고 춤 정도 추는 건 허용되고 때로는 권장되기도 한다.

동아시아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노래방이 한때 북한에서도 널리 퍼졌었다. 그러나 몇 년 전부터 금지되었다. 주민들이 자본주의 사상에 빠져들까 우려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노래방 인기는 여전하다. 드물긴 하지만 암암리에 문을 열고 있다.

영화로 가면 얘기는 달라진다. 북한주민의 여가생활 대부분은 바로 영화가 차지한다. 한 연구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북한주민 평균 연간 관람 횟수가 15~17회에 이른다. 이는 남한은 물론 선진국보다도 자주 영화를 본다는 얘기다. 물론 매주 새로운 영화를 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북한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몇 편 되지 않으며 북한으로 반입이 허용되는 해외영화도 얼마 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한에서는 똑같은 영화가 몇 년에 걸쳐 전국 각지를 돌며 상영된다.

지방 극장에서는 1990년대 영화도 상영됐다가, 몇 주 뒤엔 그 무렵의 딴 영화로 대체되는 경우도 많다. 요즘 북한주민들은 당국이 제작한 이념적이고 지루하기만 한 영화를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이러한 주민들의 북한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남한의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VCR과 DVD플레이어를 통해 북한에 유입되면서 비롯됐다.

현재 북한 가정의 75% 가량이 VCR과 DVD플레이어 등의 오락용 기기를 보유하고 있다. 이들 기기를 통해 남한과 서양의 방송을 시청하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지만, 이를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 아니다. 이들 기기를 통해 남한이나 중국 심지어 미국에서 제작된 드라마를 몰래 시청하는 가정이 점점 늘고 있다.

북한에서 독서활동은 어떤가? 한마디로 별로 인기가 없다. 북한에서 읽을 수 있는 책은 대부분 질도 떨어지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생산공장의 대표가 노동자들의 비슷비슷한 고난과 역경을 수백 페이지에 걸쳐 지루하게 묘사하는 소설에 누가 흥미를 갖겠는가?

최근 10년 사이 사립 유료도서관이 북한에서 문을 열고 있다. 이들 도서관에선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것이 허용된다. 재밌고 읽힐 만한 책이 자연히 책장에 채워질 수밖에 없다. 이들 도서관에 구비되는 책 중에는 북한책도 많기는 하지만, 가장 인기가 좋은 건 번역서, 특히 탐정소설이다. 서양도서는 사상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북한에서 출판되지 않는다. 따라서 번역서 대부분 동유럽에서 들여온다.

영화, 독서, 방송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의 여가활동이 가능한데도 북한주민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은 ‘만남’ 그 자체다. 이웃이나 친구의 집을 방문한다든지, 가족, 친구, 직장동료들과 소풍을 가는 등의 여가활동을 즐긴다. 춤 추고 노래하며 얘기꽃을 피우는 일, 산업화 물결에 깊숙이 빠진 ‘잘사는 나라’에선 반쯤 잊혀진 ‘만남의 즐거움’을 북한주민들은 아직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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