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
[오늘의 시]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박노해
봄비를 맞으며 옥수수를 심었다 알을 품은 비둘기랑 꿩들이 반쯤은 파먹고 그래도 옥수수 여린 싹은 보란 듯이 돋았다 6월의 태양과 비를 먹은 옥수수가 돌아서면 자라더니 7월이 되자 어머나, 내 키보다 훌쩍 커지며 알이 굵어진다 때를 만난 옥수수처럼 무서운 건 없어라 옥수수처럼 자랐으면 좋겠다 네 맑은 눈빛도 좋은 생각도 애타고 땀 흘리고…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진공 상태’ 박노해
여름날 아흐레쯤 집을 비웠더니 밭에도 흙마당에도 풀이 가득하다 풀을 뽑다 돌아보니 어느새 풀이 돋아난다 여름에는 풀이 나는 게 아니라 풀이 쳐들어온다 빈 공간을 사정없이 침투하고 무참하게 진군해 온다 자연에는 진공 상태가 없다 사회에는 백지 상태가 없다 권력에는 순수 상태가 없다 이념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혁명이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돋는가…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걷는 독서’ 박노해
눈 덮인 자그로스 산맥을 달려온 바람은 맑다 따사로운 햇살은 파릇한 밀싹을 어루만지고 그는 지금 자신의 두 발로 대지에 입 맞추며 오래된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선조들의 복장과 걸음과 음정 그대로 근대의 묵독 이전의 낭송 전통으로 ‘걷는 독서’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독서의 완성은’ 박노해
나는 보았다 아니, 보아버리고 말았다 나는 만났다 아니, 만나버리고 말았다 나는 읽었다 아니, 읽어버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나는 이제까지의 나를 ‘버리고’ 그 진리 앞에 응답해야 한다 온 삶으로 읽고, 읽어버린 것을 살아내야만 한다 독서의 완성은 삶이기에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한 권의 책을 써나가는 사람이니 삶이라는 단 한 권의 책을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모내기 밥’ 박노해
봄을 타는가보다 며칠째 입맛이 없다 문득 맛난 음식들이 떠오른다 내 인생에 가장 맛난 음식들은 유명한 맛자랑 요리집도 아니고 솜씨 좋은 울 엄니가 차려준 음식도 아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 모내기할 때 논두렁가에 둘러앉아 먹던 그 모밥이다 못줄을 잡고 모를 쪄 나르던 어린 나에게도 뜨끈한 고봉밥 한 그릇이 주어지고 감자와 무토막을 숭덩숭덩…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들어라 스무 살에’ 박노해
반항아가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탐험가가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시인이 살지 않는 가슴은 젊음이 아니다 너는 지금 인류가 부러워하는 스무 살 청춘이다 스무 살 폐부 속에 투지도 없다면 스무 살 심장 속에 정의도 없다면 스무 살 눈동자에 분노도 없다면 알아채라, 네 젊음은 이미 지나가 버렸음을 들어라 스무…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돌아온 소년’ 박노해
파리 꼬뮌이 무너진 1871년 5월 28일 지배 계급은 수도 탈환을 축하하며 잔인하게 노동자와 시민들을 죽이기 시작했다 수많은 소년 소녀들도 총을 들고 거리에서 싸우다 죽어갔다 열 다섯 쯤 돼 보이는 앳된 소년 노동자 한 명이 베르사유군에 체포되어 총살되기 직전이었다 소년은 자기 손목에 채워진 은시계를 풀러 가까이에 살고 있는 가난한 홀어머니에게 갖다…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눈물 흐르는 지구의 골목길에서’ 박노해
나는 많은 길을 걸어왔다 내가 걷는 길은 태양보다 눈물이 더 많았다 아침부터 찬 비가 내린다 나에게 지구는 하나의 커다란 눈물방울 젊어서 먼저 생을 완주한 나의 동지들이 폭음 속에서 내 품에 안기던 여윈 아이들이 영혼의 총을 들고 산으로 가던 소녀 게릴라들이 그만 등을 돌리고 싶은 길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 눈물이 길이다…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우리가 만나’ 박노해
처음 해보는 부모 노릇, 처음 해보는 아이 노릇, 모자라고 실수투성이인 우리가 만나 서로 가르치고 격려하고 채워주며 언젠가 이별이 오는 그날까지 이 지상에서 한 생을 동행하기를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우리 할머니 말씀’ 박노해
어린 날 글자도 모르는 우리 할머니가 그랬지 아가, 없는 사람 험담하는 곳엔 끼지도 말그라 그를 안다고 떠드는 것만큼 큰 오해가 없단다 그이한테 숨어있는 좋은 구석을 알아보고 토닥여 주기에도 한 생이 너무 짧으니께 아가, 남 흉보는 말들엔 조용히 자리를 뜨거라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가리지 마라’ 박노해
너의 눈감음으로 세상의 모든 새벽을 가리지 마라 너의 둔감함으로 세상의 모든 새싹을 가리지 마라 너의 눈부심으로 세상의 모든 슬픔을 가리지 마라 너의 체념으로 세상의 모든 진실을 가리지 마라 너의 절망으로 세상의 모든 희망을 가리지 마라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사랑이 그러네요’ 박노해
난 정직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사랑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드네요 난 현명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사랑이 나를 바보처럼 만드네요 난 당당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사랑이 나를 초라하게 만드네요 난 한결같은 사람이라 들었는데 사랑이 나를 변덕쟁이로 만드네요 난 명랑한 사람이라 들었는데 사랑이 나를 눈물짓게 만드네요 사랑이 그러네요 그러네요 사랑이 나 벌거벗은 인간으로 오 가련한 사람으로…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여행자’ 박노해
여행을 나서지 않는 이에게 세상은 한쪽만 읽은 두꺼운 책과 같아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자기 밖의 먼 곳으로 여행을 가야 한다 나 자신마저 문득 낯설고 아득해지는 그 먼 곳으로 하지만 낯선 땅이란 없다 단지 그 여행자만이 낯설 뿐 가자 생의 여행자여 먼 곳으로 저 먼 곳으로 더 높은 곳으로 깊은…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종자’···박노해 “파릇파릇 새로운 세상을 열어”
종자로 골라내진 씨앗들은 울부짖었다 가을날 똑같이 거두어졌건만 다들 고귀한 식탁 위에 오르는데 왜 나는 선택받지 못한 운명인지요 남들은 축복 속에 바쳐지는데 나는 바람 찬 허공에 매달려 온몸이 얼어붙고 말라가야 하는지요 씨앗들은 눈 녹은 찬물에 몸을 불리고 바람 찬 해토解土의 대지에 뿌려져 또 한 번 캄캄한 땅 속에 묻혀 살이 썩어내리고…
더 읽기 » -
문화
[오늘의 시] ‘꿈을 품은 사람아’ 박노해
꿈을 품은 사람아 시린 겨울 대지를 바라보자 꽃들은 훗날을 위해 언 땅속에 자신의 씨앗을 미리 묻어 놓았다 오늘 피어날 자신을 버리듯이 겨울 대지에 미리 묻어 놓았다 꿈은 봄에 꽃 피어날 씨앗처럼 겨울 가슴에 품어 기르는 것이니
더 읽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