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에서 다시 만난 그녀…레클리스는 아직도 언덕을 오른다

연천의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정류장’을 찾아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득 레클리스 카페가 생각났다. 얼마 전 나는 「War Horse에서 레클리스 카페까지…전쟁을 짊어진 동물들」이라는 글을 썼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 해병대의 군마 레클리스. 탄약을 나르고 부상병을 옮기며 포성이 쏟아지는 능선을 오르내렸던 말이다. 병사들은 그녀를 단순한 군마가 아니라 전우로 기억했다.
집으로 가기 전에 한번 찾아가 보기로 했다. 내비게이션에 ‘레클리스 카페’를 찍었다. 막상 도착하니 차를 세울 곳이 마땅치 않아 근처 농협 하나로마트 주차장에 차를 댔다. 카페와 바로 옆 분식집을 보았지만 손님이 없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발길을 돌렸다.
하나로마트에 들어가 복숭아 몇 개를 샀다. 계산하면서 캐셔에게 물었다. “이 근처에 뭐 볼 만한 데가 있습니까?” 캐셔는 고개를 저으며 “없어요”라고 했다. 더 묻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냥 돌아가야겠다 싶어 왔던 길을 되짚었다.

그러다 백학저수지가 나타났다. 넓은 물 위에는 수련이 빼곡했다. 꽃이 만발한 풍경은 아니었지만 초록빛 잎들이 수면을 거의 덮고 있었고, 한쪽에는 낚시터 같은 곳도 보였다. 그때 호수 한가운데 무엇인가가 눈에 들어왔다.
둥근 섬이었다. 섬 주위로 네모난 부교가 놓여 있었고 한쪽 끝은 육지와 이어져 있었다. 폭은 1.5미터쯤 되어 보였다. 차창 너머로 바라보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호수 한가운데 무엇인가를 모셔놓은 듯했다. 순간 적멸보궁 같은 느낌이 스쳤다.
그런데 그 위에 무엇인가가 있었다. 황금빛 한 마리의 말이었다. 바위를 딛고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차를 몰면서도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알아보았다. 그녀였다. 레클리스였다.
양쪽에 탄약통을 세 개씩, 모두 여섯 개를 매달고 있었다. 전쟁터에서 탄약을 짊어진 채 언덕을 오르던 바로 그 모습이었다. 나는 차를 세우고 내렸다. 조금 전 캐셔는 이 근처에 볼 만한 데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나는 지금 분명히 보고 있었다. 호수 한가운데, 수련 사이에서 황금빛으로 빛나는 한 마리의 말.

부교를 따라 걸었다. 물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녀의 모습이 더욱 선명해졌다. 앞발 하나를 바위 위에 올리고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올라가고 있었다.
전쟁은 끝난 지 오래다. 포성도 들리지 않고 총탄도 날아오지 않는다. 부상병도 없다. 그런데 그녀는 아직도 탄약을 짊어진 채 언덕을 오르고 있었다. 1953년 어느 고지에서 그랬던 것처럼. 다만 그때와 달라진 것이 있다면, 지금 그녀가 오르는 곳에는 포연 대신 수련이 있고 총성 대신 잔잔한 물결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문득 앞서 썼던 글을 떠올렸다. 전쟁은 인간만의 비극이 아니라고 썼다. 말과 개와 비둘기와 노새와 낙타까지 인간이 만든 전쟁에 끌려 들어갔다. 그들은 국가도 이념도 알지 못한다. 그저 인간이 만든 폭력 속에서 짐을 지고, 길을 찾고, 쓰러지는 몸을 견뎠다.
그중에서도 레클리스는 특별했다. 실제로 전쟁을 겪었고, 탄약을 날랐으며, 병사들과 생사를 함께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미 해병대에서 하사 계급까지 받았다. 그런 그녀가 이제 이곳에 있다. 전쟁터에서는 병사들과 함께 언덕을 올랐고, 지금은 아무도 재촉하지 않는 평화로운 호수에서 홀로 언덕을 오른다.
그녀는 여전히 올라가고 있었다. 아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전쟁의 승리만은 아닐 것이다. 그 전쟁을 함께 견뎌낸 생명들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은 전쟁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기억은 돌아가지 않는다. 어딘가에 남아 그날의 길을 다시 걷고, 다시 오른다.
그날 나는 그것을 보았다. 수련이 가득한 호수 한가운데서 여섯 개의 탄약통을 짊어진 채 바위를 딛고 올라가는 한 마리의 말. 호수에서 다시 만난 그녀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