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기의 사람 읽기] 내 매형 우기복, 가족과 신앙을 평생 품고 살아온 사람

나는 우기복을 오래 품는 사람으로 본다. 고향을 오래 품었고, 가족을 오래 품었고, 신앙을 오래 품었다. 젊은 날 이루지 못한 글쓰기의 꿈도 버리지 않고 품었다.
그는 내 매형이다. 누님과 결혼한 뒤 반세기 가까이 나는 그를 그냥 ‘매형’이라고 불러왔다. 가족은 가까워서 잘 아는 것 같지만,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모르는 것이 많다. 나 역시 얼마 전까지 매형이 어떤 어린 시절을 보냈고, 무엇을 꿈꾸었으며, 어떤 시간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것을 알게 해준 것이 매형의 글이었다. 우기복은 충남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에서 태어났다. 3남5녀 8남매 가운데 넷째이자 장남이다. 1951년 기산초등학교에 들어가 1957년 졸업했다. 그의 글에 자주 등장하는 ‘영멀’은 기산면 소재지를 부르던 고향 이름이다. 그의 기억 속 영멀에는 고구마가 있고, 개울이 있고, 서천역으로 아버지를 마중 가던 밤길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 있다. 머리에 무거운 쌀과 잡곡을 이고 산모퉁이를 돌아오던 어머니, 연과 썰매를 만들어주던 외삼촌, 어린 눈에는 무서워 피하기만 했으나 훗날 생각해보니 마음 따뜻했던 장애인 ‘돌간이’ 아저씨가 있다.
1950년대의 가난도 있다. 그러나 매형은 가난을 가난으로만 기억하지 않는다. 겨울 움막에 고구마가 가득 쌓여 있으면 어린 마음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든든했다고 썼다. 그래서 ‘내고향 영멀’ 첫 글 제목도 ‘고구마 반쪽의 행복’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매형이라는 사람의 한쪽을 본다. 많이 가진 것을 기억하기보다, 적게 가지고도 충만했던 순간을 기억하는 사람이다.
글에 대한 꿈도 일찍 생겼다. 고등학교 때부터 해마다 신춘문예에 소설을 냈다고 한다. 당선되지는 않았다. 그래도 또 쓰고 또 냈다. 군대에 가서도 그 끈을 놓지 않았다.

1967년 공군에 입대해 헌병으로 복무했다. 군 생활 중이던 1969년에는 동생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전보 한 장을 받았다. 반세기가 훨씬 흐른 뒤에도 그는 그날을 잊지 못했다. 2022년 <아시아엔>에 쓴 ‘동생 꽃상여와 공군 헌병대 추억’에는 부고 전보를 받아든 젊은 병사의 충격과 동생을 꽃상여에 실어 보내던 형의 마음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의 생애에는 시간이 지워주지 못하는 장면이 있다. 매형에게는 그날이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군 복무를 마치고 서울에서 생활 기반을 잡았다. 누님과 가정을 꾸렸고, 1978년 중앙일보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발송 업무를 했고 이후 판매국에서 일했다. IMF 외환위기를 거쳐 1999년 회사를 떠날 때까지 20년 넘게 신문사에서 일했다.
매형은 기자가 아니었다. 신문에는 지면에 이름이 실리는 기자가 있지만, 매일 아침 그 신문이 독자에게 도착하도록 뒤에서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발송하고, 판매망을 관리하고, 독자를 만나는 사람들이다. 매형은 그쪽에서 긴 세월을 보냈다.
나는 오히려 그것도 매형답다고 생각한다. 앞에 나서기보다 자기 몫을 오래 하는 사람. 그 삶에서 가장 오래 감당한 몫은 직장이 아니었다. 가족이었다.

매형과 누님에게는 두 아들 제용과 제호가 있다. 둘째 제호는 뇌성마비 지체장애 1급이다. 제호에게는 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2015년 <아시아엔>이 매형의 책 <모자원고개 가는 길>을 소개하면서 가장 주목했던 것도 이 가족의 이야기였다.
당시 매형과 누님의 기도는 이것이었다. 아들보다 자신들이 조금만 더 오래 살게 해달라는 것이었다. 장애가 있는 자녀를 둔 부모라면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금방 알 것이다. 자식보다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은 보통 부모에게는 이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평생 돌봄이 필요한 자녀를 둔 부모에게는 마지막까지 자식을 지켜주고 싶다는 절박한 기도다.
매형과 누님은 그렇게 제호를 47년 품고 살았다. 그 세월 동안 가족끼리 마음 편하게 여행 한번 가기도 쉽지 않았다. 둘째에게 손이 더 갈 수밖에 없으니 첫째 제용에게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제용이 중학생 때 어머니에게 했다는 말이 오래 남는다. “엄마, 참 행복해요. 죄 지어본 적이 없는 제호랑 사는 게 좋아요.” 그 한마디에 이 가족이 살아온 세월이 들어 있다.

최근에는 또 하나의 큰 결정을 했다. 올해 4월 28일, 매형과 누님은 오랫동안 집에서 돌봐온 제호를 장애인 시설에 보냈다. 나서부터 몇달 전까지 곁에 두고 살다가 다른 사람의 손에 맡기는 부모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나는 감히 다 안다고 말할 수 없다.
누님은 10여 년째 파킨슨병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매형도 이제 팔십대 중반에 다가가고 있다. 언젠가는 해야 할 결정이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부모의 가슴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지 않는다.
나는 매형이 제호를 오래 품은 것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마침내 자신의 품에서 놓아 보다 안정적인 돌봄을 받게 한 것 역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붙드는 것만 사랑은 아니다. 때로는 놓아주는 데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
그 긴 세월을 지탱한 힘 가운데 하나가 신앙이었다. 매형은 모태신앙이다. 어린 시절 고향의 작은 예배당에서 시작된 믿음은 서울 생활에서도 이어졌다. 1991년 장로로 장립됐다.

직장이 바뀌고 사는 곳이 바뀌고 자식들이 자라는 동안에도 교회는 그의 생활에서 빠지지 않았다. 나는 가까이에서 보아왔다. 매형에게 신앙은 남에게 보여주는 말이 아니라 버티게 하는 힘에 가까웠다. 제호를 두고 왜 우리 가족에게 이런 일이 생겼느냐고 묻고 싶은 날도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매형은 <모자원고개 가는 길>에서 제호를 두고 자신들에게 주어진 ‘사랑의 십자가’라고 했다. 그리고 다시 글을 썼다.
2014년 <모자원고개 가는 길>을 냈다. 젊은 날부터 틈틈이 써두었던 글들을 모은 책이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021년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아시아엔>에 「내고향 영멀」을 연재했다. 모두 10편이다.
고구마 반쪽, 6·25전쟁, 어머니의 노래, 예배당 종, 아버지를 마중 가던 서천역 밤길, 어린 날 만난 사람들, 먼저 떠난 동생….거창한 역사책에는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이런 기록이야말로 역사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대통령과 장군만 사는 것이 아니다. 1951년 시골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도 역사를 살았다. 고구마 반쪽으로 허기를 달랜 아이도 역사를 살았고, 쌀과 잡곡을 머리에 이고 산길을 넘어온 어머니도 역사를 살았다. 동생이 죽었다는 전보를 받아든 젊은 공군 병사도 역사를 살았으며, 신문이 독자의 집에 제대로 도착하도록 20년 넘게 발송과 판매 현장을 지킨 직장인도 역사를 살았다. 장애가 있는 아들을 46년 가까이 품고 산 부모의 세월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기록에는 뜻밖의 힘도 있다. 매형이 쓴 서천 고향 이야기를 읽고, 미국에 살다 잠시 한국에 나온 60여 년 전 교우에게서 연락이 온 것이다. 그렇게 끊겼던 고향의 인연이 인터넷에 남은 글 한 편을 통해 다시 이어졌다. 나는 그 일을 보면서 기록이 시간을 건너 사람을 다시 만나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요즘 매형에게 더 쓰시라고 한다. 영멀 이야기도 더 쓰고, 누님과 살아온 이야기도 쓰고, 중앙일보에서 보낸 세월도 쓰고, 제용과 제호의 아버지로 살아온 날들도 써두라고 한다. 매형은 “이제 기억도 잘 안 난다”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바로 그래서 써야 한다. 사라지기 전에.
사마천은 사람을 기록하면서 그가 얼마나 높은 자리에 올랐는지만 보지 않았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무엇을 선택했는지, 평생 무엇을 버리지 않았는지를 보았다. 나도 사람을 그렇게 읽어보고 싶다.
그 기준으로 내 매형 우기복을 보면 화려한 이력이 먼저 보이지 않는다. 고향을 떠난 뒤에도 영멀을 잊지 않은 사람. 고등학교 시절 시작한 글쓰기를 수십 년 뒤 다시 붙든 사람. 한 직장에서 20년 넘게 자기 일을 한 사람. 모태신앙으로 시작한 믿음을 노년에 이르도록 붙든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도움이 필요한 아들을 46년 가까이 품고 살아온 아버지가 보인다.
사람은 무엇을 얻었는가보다 무엇을 오래 지켰는가로 설명되는 경우가 있다. 나는 우기복이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하지 않아도 한 사람의 생애는 기록될 가치가 있다. 오히려 우리 시대에 부족한 것은 이런 사람들의 기록인지 모른다. 아버지가 어떤 청년이었는지, 어머니에게 가장 힘들었던 날은 언제였는지, 형제들이 무엇을 함께 견뎠는지 묻기도 전에 한 세대가 떠나고 있다.
나도 매형을 오래 알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매형의 글을 읽고 이야기를 다시 들으면서 이제야 조금씩 그를 알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계속 사람을 쓰려 한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만이 아니라, 내가 살아오며 만난 사람들, 자기 자리에서 긴 세월을 견딘 사람들을 기록하려 한다.
그 첫머리에 군사라는 한 우물을 30년 넘게 판 유용원이 있었다면, 그 다음에는 가족과 신앙과 고향을 오래 품고 살아온 내 매형 우기복이 있다.
사람의 자리는 언젠가 사라진다. 직함도 사라진다. 그러나 한 사람이 평생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지켰는지는 남는다. 우기복에게 그것은 가족이었고, 신앙이었고, 고향 영멀이었다.
나는 매형이 오래 더 써주기를 바란다. 그 기록이 매형 한 사람의 이야기를 넘어, 고구마 반쪽으로도 행복할 줄 알았고 가족에게 주어진 몫을 묵묵히 감당하며 살아온 한 세대의 ‘열전’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