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오딧세이’ 개봉…”오디세우스는 돌아왔고, 텔레마코스는 떠났다”

호메로스와 단테, 조이스를 지나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와 단테의 오디세우스는 같은 사람일까?” 오랫동안 마음 속에 남아 있던 질문이다. 같은 이름을 가진 두 시대의 인간이다. 그러나 한쪽에서는 귀환의 영웅이고, 다른 쪽에서는 돌아오지 못한 인간이다.
아마 문학이 흥미로운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시대가 바뀌면 같은 인간도 다른 얼굴을 갖는다.
돌아오는 인간…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오디세우스의 위대함은 전쟁의 승리가 아니다. 그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10년의 방랑 끝에 찾은 것은 새로운 정복지가 아니라 고향 이타카였다. 키클롭스의 동굴을 지나고, 세이렌의 유혹을 견디며, 키르케의 섬과 칼립소의 섬을 지나면서도 그가 잊지 않은 것은 돌아갈 곳이었다.
오디세우스의 여정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질문을 담고 있다. “나는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가?”
너무 멀리 간 인간…단테의 오디세우스
그러나 단테의 『신곡』 ‘지옥편’ 제26곡에서 오디세우스는 다른 얼굴을 가진다. 그는 불꽃 속에 갇힌 영혼이다. 단테가 그를 벌한 이유는 지식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지식에 대한 열망 자체가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한계를 넘어 자신만의 힘으로 끝없이 나아가려 했다는 점이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에게 중요한 것은 귀환이었다면, 단테의 오디세우스에게 비극은 귀환할 수 없는 항해였다.
한 사람은 집으로 돌아왔고, 다른 사람은 너무 멀리 가버렸다.
하루를 살아내는 인간…조이스의 블룸
20세기에 이르러 제임스 조이스는 오디세우스를 다시 불러낸다. 그러나 그의 영웅은 왕도 전사도 아니다. 레오폴드 블룸. 그는 더블린의 거리를 걷고, 장례식에 참석하고, 음식을 먹고, 생각하고, 결국 집으로 돌아오는 평범한 사람이다.
조이스는 묻는다. “영웅이란 반드시 위대한 일을 하는 사람인가?” 아마 그의 대답은 이러할 것이다. “아니다. 하루의 삶을 견디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도 영웅이다.”
더블린에서 만난 나의 오디세우스
여러 해 전 더블린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을 때, 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따라가 보았다. 영화로 먼저 더블린의 모습을 익힌 뒤, 학회가 끝난 어느 날 샌디코브행 기차를 탔다. 바닷가를 따라 걸으니 마텔로 타워가 보였다. <율리시스>의 표지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바로 그 장소였다.
그곳에서 뜻밖의 장면을 만났다. 스페인에서 온 부부가 고등학생 또래의 남매를 데리고 와 있었다. 어머니는 의자에 앉고, 나머지 세 사람은 둘러서서 <율리시스> 첫 장을 소리 내어 읽고 있었다.
그 작은 방에서 3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호메로스의 이야기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조이스는 평범한 더블린의 하루 속에 호메로스의 오디세우스를 불러냈다. 오디세우스가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구혼자들의 위협 속에서도 아버지를 기다리던 아들 텔레마코스. 그 오래된 이야기가 20세기 더블린의 한 방에서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때 나의 아들도 내 곁에 있었다. 나는 그가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아직 깊이 생각하지 못했다.
아들과 함께 오줌 누다
그날 이후 오래도록 기억에 남은 것은 거대한 문학이 아니라 아주 작은 장면이었다. 조이스의 소설에서 블룸은 스티븐 디덜러스를 집으로 데려가 이야기를 나눈다. 피로 이어진 부자는 아니지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잠시 아버지와 아들이 된다. 영화에서는 이 장면을 둘이 나란히 담벼락에 소변을 보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며칠 뒤 더블린의 어느 술집에서 아들과 함께 화장실을 찾았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아들과 나란히 서서 오줌을 누는 일이. 블룸과 스티븐이 서 있던 정원의 담벼락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학의 도시 더블린에서, 내 언어로 내 아들과 이야기하며 서 있었다.
그 순간 알았다. 가장 위대한 귀환은 먼 곳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함께 돌아갈 사람이 있다는 사실 속에 있다는 것을.
오디세우스는 돌아왔고, 텔레마코스는 떠났다
시간은 흘렀다. 그때 내 곁에 서 있던 아들은 이제 정신과 의사가 되어 한 가정을 이루고 있다. 2014년 더블린에서 그는 마치 텔레마코스처럼 아버지와 누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자신의 배를 타고 떠났다.
그 떠남은 이별이 아니었다. 호메로스의 텔레마코스도 아버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고, 그 여정 속에서 자신의 이름을 얻었다.
자녀는 부모 곁에 머물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언젠가 자신의 바다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 태어난다. 남아 있는 자녀들도 각자의 속도로 항해하고 있다. 누구는 순풍을 만나고, 누구는 폭풍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항해에는 자기만의 시간이 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은 배를 대신 몰아주는 것이 아니다. 멀리서 등불을 밝혀주는 것이다.
날개는 품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순간 부모는 알게 된다. 날개는 품기 위해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날려 보내기 위해서도 있다는 것을. 까치는 먹이를 물어 나르고 위험을 막아주지만, 어느 날 새끼가 자기 날개로 둥지를 떠나는 순간을 맞이한다.
부모는 빈 둥지를 바라보며 슬퍼하기만 하지 않는다. 자신이 지켜준 작은 생명이 이제 자기 하늘을 찾았음을 조용히 기뻐한다.
오디세우스는 돌아왔고, 텔레마코스는 떠났다. 그러나 돌아옴과 떠남은 서로 반대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갈 곳을 지키고 있었기에, 아들은 자신의 항해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인생에서 가장 긴 항해는 내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항해를 시작하도록 기다려주는 시간인지도 모른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