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교육

원로학자 신복룡 교수의 4천권 장서, 어디로 가야 하나…“평생 연구자료 지켜줄 독지가 찾습니다”

신복룡 교수

한 학자가 평생 읽고 모으고 기록한 책은 단순한 개인 소유물이 아니다. 한 시대의 학문적 궤적이자 다음 세대 연구자들이 이어가야 할 지적 자산이다. 정치학자이자 한국 현대사 전문가인 신복룡(84) 전 건국대 석좌교수가 평생 모은 전문서적 4천여 권과 연구노트 약 40상자를 아무런 대가 없이 기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다만 장서를 흩어 팔거나 일부만 골라가는 것이 아니라, 서울 근교에 문고를 마련해 온전히 보존하고 연구자들에게 공개해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신 교수의 호소를 계기로 원로 연구자들의 장서와 연구자료를 어떻게 보존할 것인지 우리 사회가 함께 고민할 때다. <편집자>

신복룡 현대사 전문가, 장서 4천 권과 연구노트 기증
한국 정치사상·현대사·동학·독립운동 관련 희귀자료 포함
“서울 근교에 개인 문고 설치해 온전히 보존해주길”

“제가 이제 나이가 많습니다. 학문을 접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가장 고민스럽고 안타까운 것은 장서 4천 권을 어찌해야 하나 하는 문제입니다.”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신복룡 원로 역사학자가 최근 자신의 페이스북에 평생 모은 장서와 연구자료를 보존해줄 개인이나 기관을 찾는다는 글을 올렸다.

신 교수는 유관 단체로부터 귀중본 200권만 선별해 가져가겠다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 제안은 그에게 해결책이라기보다 절망으로 다가왔다. 그는 “나머지 책은 어떻게 되는가. 휴지가 될 운명”이라며 “안 먹고 안 입고 마련한 전문서적을 버려야 한다니 가슴이 저린다”고 했다.

신 교수의 장서는 단순히 오래된 책을 모아놓은 개인 서재가 아니다. 한국 정치사상과 현대사, 동학, 종교, 독립운동을 비롯해 중국 고전과 국내외 학술자료까지 아우르는 전문 학술 컬렉션이다. 특히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한국전쟁과 한반도 분단 관련 1차 사료, 박사학위논문 작성에 사용한 동학 연구 원자료와 사진, 근대 한국을 기록한 외국인 선교사와 여행가의 저술과 희귀본 등이 포함돼 있다.

신 교수는 이 자료들을 활용해 한국 정치사상과 현대사, 동학, 국제정치 분야를 오랫동안 연구했다. 『삼국지연의』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번역에 사용한 자료도 장서에 포함돼 있다. 장서뿐 아니라 연구노트와 자료철 약 40상자도 함께 보존되기를 바라고 있다. 완성된 저서보다 연구자가 자료를 읽고 분류하며 생각을 발전시킨 흔적이 담긴 연구노트가 후대 연구자들에게는 더 귀중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신 교수는 한국에서 장서를 온전히 보존할 곳을 찾지 못하면 한국학을 가르치는 외국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안까지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그 방법은 내가 참으로 가고 싶지 않은 길”이라며 “조국이 나를 버리면 나도 책을 버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평생 한국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한 학자의 자료가 국내에서 갈 곳을 찾지 못해 해외로 떠나야 한다면, 이는 한 개인의 안타까움에 그치지 않는다. 한국 학계와 공공기관, 대학, 지방자치단체가 연구자의 지적 유산을 보존하는 데 얼마나 무관심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될 수 있다.

신 교수는 장서와 연구자료를 아무런 대가 없이 기증하겠다고 밝혔다. 대신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서울 근교에 개인 문고를 설치해 장서를 온전히 보존할 것.
둘째, 약 40상자에 달하는 연구노트와 자료철을 버리지 않을 것.
셋째, 지나치게 늦지 않게 장서를 정리해 문고를 개관할 것.

신 교수는 일부 희귀본만 선별해 가져가거나, 장서를 분산하는 방식은 바라지 않는다. 책과 자료, 연구노트가 하나의 학술 컬렉션으로 함께 보존돼야 그 가치가 살아난다는 뜻이다.

‘신복룡 학술 컬렉션’은 고조선과 단군시대부터 박정희 시대에 이르는 한국 정치사상 자료를 비롯해 광복과 분단, 한국전쟁 관련 문헌을 포함하고 있다. 개신교·천주교·불교·신종교 및 유사종교 자료, 동학 연구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자료, 일제강점기와 독립운동 관련 사료도 주요 부분을 차지한다. 한국 현대 주요 인물의 전기와 자서전, 국내외 학술단체의 학술지와 학술회의 자료, 중국의 고전과 역사·정치사상 관련 문헌도 소장돼 있다.

근대 한국을 찾은 외국인 선교사와 여행가들의 저술, 사진자료와 희귀본은 한국 근현대사의 외부 시선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신 교수 자신의 저서 약 50권도 포함돼 있다.

책은 한 사람의 생애보다 오래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러나 책이 흩어지고 연구노트가 폐기되면 한 학자가 평생 쌓아온 지식의 연결고리도 함께 사라진다. 원로 학자의 장서를 보존하는 일은 개인을 기념하는 사업만은 아니다. 다음 세대 연구자들이 선행 연구의 흔적을 살피고, 그 위에서 새로운 질문을 시작할 수 있도록 학문적 토대를 남기는 일이다.

신복룡 교수의 바람은 거창하지 않다. 자신이 평생 모은 책과 자료가 한곳에서 보존되고, 연구를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다시 읽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문장은 짧다. “나의 꿈이 이뤄지기 바라며.” 이제 그 꿈에 누가 응답할 것인가. 대학과 연구기관, 지방자치단체, 기업 재단과 문화재단, 그리고 학문과 역사를 사랑하는 독지가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때다. 한 역사학자의 평생이 담긴 4천 권의 책이 폐지로 사라지거나 고국을 떠나기 전에, 이 지적 유산을 지켜낼 공간과 사람을 찾아야 한다.

신복룡 학술 컬렉션 주요 내용

한국 정치사상: 고조선·단군시대부터 박정희 시대까지
한국 현대사: 광복·분단·한국전쟁 관련 자료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수집한 1차 사료
한국 종교: 개신교·천주교·불교·신종교 관련 자료
동학 연구 원자료·사진·박사학위논문 관련 자료
일제강점기·독립운동 관련 문헌과 사료
국사편찬위원회 편찬 자료와 역사 문헌
중국 고전·역사·정치사상 자료
한국 현대 주요 인물 전기와 자서전
국내외 학술지·학술회의 발표논문집
『삼국지연의』·『플루타르코스 영웅전』 번역 연구자료
외국인 선교사·여행가의 근대 한국 관련 저술과 희귀본
연구노트·자료철 약 40상자
신복룡 교수 저서 약 5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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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기

아시아엔 기자, 전 한국기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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