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덕암교회 ‘녹슨 종’이 들려준 가장 ‘맑은 소리’

집에서 새벽같이 출발했지만 전북 고창의 덕암교회에 도착한 것은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였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달리다 큰길에서 좁은 농로로 접어드는 길목에 ‘순교의 터 위에 선 교회, 덕암교회’라는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 표지판을 지나 밭길을 따라가니 한적한 들판 너머로 작은 첨탑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교회 근처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니 주일예배가 한창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찬송가 소리가 조용한 마을에 번져 나왔다. 마침 한 젊은이가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기에 나도 조심스럽게 뒤를 따랐다.
예배당으로 이어지는 작은 복도였다. 벽에는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과 그 협력자들에게 희생된 성도들의 사진과 사연이 패널에 정리되어 있었다. 이름 하나하나와 흑백사진을 천천히 바라보고 싶었지만, 예배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사진 몇 장만 남긴 채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교회 앞에는 25명의 순교자 이름이 새겨진 작은 비석과 종 하나가 놓여 있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은 탓인지 종은 심하게 녹슬어 있었다.

그 종에는 사연이 있었다. 1950년 10월 23일경 공산군과 그 협력자들이 교회 기물을 파손하며 종을 떼어 가려 했다. 시계가 흔하지 않던 시절, 교회 종은 예배 30분 전과 10분 전에 마을 사람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리는 유일한 신호였다. 그러나 그들이 가져가려 했던 것은 청동으로 만든 종만이 아니었다. 매주 그 종소리를 따라 모이던 신앙 공동체 자체였을 것이다.
목포에서 시집와서 사람들에게 ‘목포댁’이라 불리던 박안희 성도는 “예배 시간을 알리는 유일한 성물이니 가져가지 말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그녀는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종은 6km 떨어진 칠암리 신대을저수지에 버려졌다.
다음 날 박안희 성도는 우연히 종을 가져갔던 공산당 협력자를 만나 다시 종을 돌려 달라고 말했다. 그 말 한마디 때문에 그녀는 용산마을 앞산으로 끌려가 처형되었다. 홀로 남겨진 어린 아들은 훗날 장로가 되었다.
수복 후 교인들은 저수지에서 종을 찾아냈다. 그러나 종을 매다는 바퀴는 끝내 찾지 못했다. 새 바퀴를 달아 다시 종을 걸었다. 그래서 지금의 종은 오래된 몸체와 새로운 바퀴를 가진, 말하자면 ‘짝짝이 종’이 되었다.
그 바퀴를 바라보다가 문득 성 카타리나가 떠올랐다. 그녀에게 부서진 바퀴가 순교의 상징이었다면, 이 종에게는 잃어버린 바퀴가 신앙의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나는 종 앞으로 다가갔다. 망치도, 손바닥도 아니었다. 오른손 셋째 손가락 마디로 문을 두드리듯 종을 가볍게 노크해 보았다.그렇게 심하게 녹슨 종에서 맑고 깊은 소리가 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아주 작은 울림이었지만 들판을 가로질러 천천히 번져 나갔다. 나는 그 소리가 점점 작아져 마침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 순간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신앙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 의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목포댁’이라 불리던 이름 없는 한 사람에 의해 더욱 빛난다는 사실. 전쟁에서는 적군보다 이웃의 얼굴을 한 협력자가 더 두려울 때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순교자의 피를 기억하는 이 녹슨 종은 내게 성덕대왕신종 못지않은 아름다운 소리를 들려주었다는 사실.
문득 헤밍웨이의 소설 제목이 떠올랐다. For Whom the Bell Tolls. 존 던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묻지 말라. 그 종은 그대를 위하여 울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덕암교회의 종도 누군가 한 사람만을 위해 울리는 것이 아니었다. 전쟁 속에서도 신앙과 양심을 지키려 했던 모든 이름 없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그들을 기억해야 할 오늘의 우리를 위해 울리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종을 한 번 더 바라보았다. 저 종은 한때 저수지 바닥에 버려졌고, 사람들은 죽었지만, 예배를 알리는 소리만은 끝내 사라지지 않았다.
녹슨 것은 쇠였다. 그러나 종소리는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