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된 불상 곁의 병든 몸…석굴암 ‘유마거사’가 남긴 질문

본존불 뒤의 또 다른 얼굴, 유마거사
경주의 석굴암은 오래전부터 “완성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이야기되어 왔다. 둥근 석굴의 중심에 앉은 본존불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난 듯 고요하다. 균형 잡힌 얼굴, 절제된 표정,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는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이상적 상태를 응축해 놓은 듯하다.
그러나 그 완결된 중심에서 시선을 한 걸음 옮기면,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진다. 그곳에는 유마거사가 앉아 있다. 그는 편안해 보이지 않는다. 몸은 앞으로 기울어 있고, 한쪽 무릎은 세워져 긴장을 드러내며, 어깨는 미묘하게 올라가 있다. 목은 약간 움츠러들어 있고, 얼굴에는 미세한 일그러짐이 남아 있다. 이 상은 우리가 익숙하게 보아온 “초월적 존재”의 형상과는 거리가 있다. 오히려 통증을 견디는 인간의 몸에 가깝다.
더 주목할 것은 표면이다. 본존불과 달리, 유마거사의 돌은 유독 거칠게 느껴진다. 완전히 연마되지 않은 듯한 질감은 단순한 조각 기법의 차이를 넘어,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거친 표면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 혹은 “진행 중인 존재”를 암시한다.
유마거사는 출가자가 아니다. 세속에 머물면서도 깊은 깨달음에 이른 인물이며, <유마경>에서는 문수보살과 대등하게, 때로는 그를 넘어서는 지혜를 보여준다. 특히 “세속과 탈속은 둘이 아니다”라는 불이(不二)의 사상은, 이 인물을 통해 가장 강렬하게 구현된다.
석굴암에서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이 서로 마주 보게 배치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하나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장식이 아니라, 하나의 사유를 “공간으로 구현한 구조”이다. 초월적 지혜와 세속 속의 지혜, 완결된 상태와 진행 중인 상태가 서로를 향해 놓여 있다.
이 배치에는 신라 사회의 깊은 고민도 스며 있다. 유교적 윤리, 특히 ‘효’는 당시 지배층에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가치였다. 동시에 불교는 해탈과 출가를 통해 그 윤리를 넘어서는 길을 제시했다. 이 두 세계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는 하나의 해답이 바로 유마거사였다. 그는 세속에 머물면서도 깨달음에 이르렀고, 따라서 ‘효’와 ‘해탈’을 동시에 품을 수 있는 모델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이 땅이 곧 불국토”라는 신라의 이상은 유마거사의 사상과 깊이 맞닿아 있다. 번뇌의 세계와 깨달음의 세계가 둘이 아니라면, 현실의 국토 역시 정화될 수 있으며, 인간의 삶 자체가 수행의 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모든 맥락 속에서, 석굴암의 유마거사는 단순한 경전 속 인물이 아니다. 그는 하나의 철학이며, 하나의 정치적 상상력이고, 동시에 하나의 인간적 고백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병든 몸”을 지닌 채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이 점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다. 완벽하게 정제된 상태에서만 의미를 찾으려는 태도는 오히려 현대의 불안과 맞닿아 있다. 우리는 여전히 아프고, 흔들리고,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상태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이 질문이야말로 유마거사가 던지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일 것이다.
석굴암을 찾는 많은 이들이 본존불 앞에서 감탄을 멈춘다. 그러나 조금만 더 시선을 옮겨, 거친 돌의 표면과 움츠린 몸을 가진 유마거사를 바라본다면, 그 감탄은 다른 차원의 사유로 이어질 수 있다. 완성된 아름다움이 아니라, 아직 진행 중인 존재의 존엄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