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순천의 호남호국기념관을 찾았다. 호남권 유일의 호국기념관이라고 했다. 독립기념관 산하 시설이라는데,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묘하게 마음을 오래 붙드는 공간이었다.
전시관 입구에는 호남 출신 전사자들의 편지와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누군가는 가족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고, 누군가는 훈련소에서 서툰 글씨로 살아 돌아오겠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 약속들 중 많은 것은 지켜지지 못했다.
가장 마음에 남은 것은 학도병 관련 전시였다. 화개전투에 참전했던 학생들의 혈서 지원서, 명예제대증, 손으로 그린 전투상황도, 그리고 전투 회고록이 전시돼 있었다. 15세 전후의 중학생들이 9일 교육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전투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소년들이 쓰러졌다.

문득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전라도에서는 어른들이 해야 할 일을 결국 소년들이 피 흘리며 대신한 것은 아닐까. 물론 당시 상황을 단순히 비겁함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국군은 이미 붕괴 직전이었고, 지역사회 역시 좌우 대립과 공포 속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무기도 조직도 없는 민간인들에게 영웅적 저항을 기대하는 것은 후대의 사치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어떤 시대에 최소한의 체면을 지켜준 사람들을 기억하게 된다.
나는 오래전부터 무장투쟁과 독립의 의미를 그런 관점에서 생각해 왔다. 그들의 의거만으로 나라가 독립된 것은 아니다. 독립은 결국 국제정세와 일본의 패전 속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만약 그런 사람들조차 없었다면, 우리는 “36년 식민지배 동안 단 한 번도 저항하지 못한 민족”이라는 수치심까지 떠안아야 했을지 모른다.

순천에서 본 학도병들도 비슷했다. 그들이 나라를 구했느냐 아니냐보다 중요한 것은, 적어도 아무도 싸우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기념관 3층 체험관에서는 은퇴한 역사교사가 도슨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전쟁의 미스터리가 있다며 내게 질문했다. 왜 소련은 유엔 안보리에서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을까. 왜 미국은 사변 직전 철수하면서 남한에 전차를 남겨두지 않았을까. 왜 충분한 대전차 무기를 준비해 주지 않았을까.
나는 대전 전투에서 윌리엄 딘 장군 휘하 미군이 슈퍼 바주카를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를 잠시 꺼냈다. 그러나 대화를 마치고도 마음에 남은 것은 다른 부분이었다. 우리가 왜 약했는가보다, 왜 누군가가 미리 우리를 준비시켜 주지 않았는가를 먼저 묻는 태도였다.

역사는 물론 국제정치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국가의 존망을 외부의 준비 부족으로만 설명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영원한 피해자로만 남겨두게 된다.
그날 기념관에서 나는 마거릿 히긴스의 사진 패널 옆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한국전쟁 초기의 참상을 세계에 알렸던 종군기자였다. 그녀는 무너지는 서울과 피난민, 그리고 어린 학도병들의 얼굴을 기록했다.
광주의 한 여관방으로 돌아와 노트북을 열었다. 오늘의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무엇인가 남겨야 할 것 같았다.

문득 성경 속 장면이 떠올랐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은 멸망 직전의 도시를 두고 하나님께 묻는다. “의인 오십 명만 있어도 멸망시키지 않으시겠습니까?” 숫자는 계속 줄어든다. 그러나 끝내 열 명조차 남지 않는다.
오늘 순천에서 본 학도병들의 편지와 혈서는 내게 그런 질문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어떤 공동체는 수많은 영웅 때문에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남아 있는 극소수의 의인들 때문에 완전히 무너지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때때로, 너무 어린 그 의인들에게 빚을 지고 살아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