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병원 영안실 곁 작은 현충탑…잊지 말아야 할 한국전쟁의 비극

영안실 곁의 현충탑이 말해주는 것들
나는 의과대학 4년과 인턴, 레지던트 시절 대부분을 연건동에서 보냈다. 새벽 회진과 응급수술, 당직과 의국 생활의 기억이 켜켜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세월이 흘러도 서울대학교병원 후문 쪽 길을 떠올리면 특유의 공기와 냄새가 아직도 기억난다.
후문 근처에는 영안실이 있었다. 그리고 길 건너에는 창경궁의 오래된 담장이 이어져 있었다. 삶과 죽음, 왕조의 시간과 현대의 병원이 묘하게 공존하던 공간이었다.

그 영안실 근처 언덕에는 작은 현충탑 하나가 서 있다. 흔히 ‘이름 모를 자유전사비’라고 불리는 비석이다. 젊은 시절 나는 그 앞을 무심히 지나곤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그 비석이 점점 무겁게 다가온다.
1950년 6월 서울 함락 직후, 서울대학교병원에는 후송된 국군 부상병들이 입원해 있었다. 그들을 치료하던 의료진과 병원 관계자들도 함께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병원 안에서 많은 부상병과 의료진, 환자들이 인민군에 의해 희생되었다고 한다. 출범한 지 20년만에 집단학살을 인정한 2024년 4월의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원회)의 발표로도 ‘최소 330명’으로 규정하였다.
나는 처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깊은 충격을 받았다. 전쟁에서는 사람이 죽는다. 그것 자체는 비극이지만 전쟁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미 전투능력을 잃은 부상병과, 비무장 상태로 그들을 돌보던 의료진까지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로 느껴졌다.
의과대학 시절 우리는 앙리 뒤낭(Henry Dunant)과 적십자의 역사를 배웠다. 전쟁 중에도 부상병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해야 한다는 원칙, 병원과 의료진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원칙은 근대 문명이 어렵게 세운 최소한의 약속이었다. 나폴레옹의 군의관 장 라레(Dominique Jean Larrey)가 오늘날까지 존경받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그는 적군의 부상병까지 치료하였고, 전쟁 속에서도 인간성을 지키려 했다. 그런데 한국전쟁 초기 서울 한복판의 병원에서, 그 최소한의 선마저 무너졌던 것이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또 다른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이런 사건을 점점 낯설어한다. 어떤 이는 아예 알지 못한다. 전쟁의 기억은 시대에 따라 계속 재구성된다. 어느 시대는 자유와 생존을 먼저 말하고, 어느 시대는 피해와 상처를 먼저 말한다. 물론 그 모두가 역사 속 실제의 일부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문득 두려워질 때가 있다. 전쟁 속 민간인의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중요하다. 국가폭력의 희생을 돌아보는 일 역시 필요하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자유를 지키려다 희생된 사람들, 병원 안에서 부상병을 지키다 죽어간 의료진의 기억까지 함께 희미해진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잃게 되는 것일까.
얼마 전 나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불길에 휩싸인 우리 고장 인천”이라는 설명문을 읽고 한동안 마음이 무거웠다. 자유를 되찾은 작전의 기념관 안에서조차 이제는 ‘승리’보다 ‘피해’의 언어가 먼저 놓이고 있었다.

그리고 연건동의 그 현충탑이 떠올랐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시대의 언어에 따라 다시 배열될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보던 의료진까지 죽어야 했던 그 전쟁의 기억만큼은 잊혀지지 않았으면 한다.
영안실 곁에 서 있는 작은 현충탑은 오늘도 아무 말 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