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건 인하대 의대 명예교수, 박찬용 서울대병원 외상외과 교수 공동 연구…“전쟁 나면 우리는 며칠이나 피를 버틸 수 있을까.”
이 단순한 질문이 하나의 연구로 이어졌다. 국군수도병원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군 의료체계를 오래 지켜본 황건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명예교수와, 박찬용 서울대학교병원 외상외과 교수가 공동으로 수행한 연구가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은 최근 학술지 <Journal of Trauma and Injury>(2025년 9월 29일 온라인 게재)에 발표한 논문 ‘Estimated Blood Storage Requirements for a North Korean Invasion of South Korea and South Korea’s Preparedness’(북한의 남침 시 예상 혈액 저장 수요와 한국의 대비 수준)에서 이렇게 결론지었다.
“대한민국의 현행 혈액 비축량은 대규모 전쟁을 감당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이 경고는 단순한 학문적 분석을 넘어선다. 전장(戰場)에서 제때의 수혈은 생존율을 결정짓는 요인이다. 포탄과 미사일 이전에 먼저 떨어지는 것이 피라면, 국가의 전쟁 지속 능력은 병력이나 무기 숫자가 아니라 ‘혈액의 흐름’에 달려 있다. 이 글은 그 연구가 제시한 구체적 수치와 의미를 정리하고, 한국 사회가 지금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피가 부족하면 생명도, 전선도 무너진다
출혈은 전장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예방 가능한 사망원인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통계는 전투 중 사망자 중 약 30%가 제때 수혈만 이루어졌다면 생존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전장의 의료는 곧 피의 관리이며, 피가 끊기면 생명선이 끊긴다.
황건 교수와 박찬용 교수의 연구는 가상의 남북 무력충돌을 상정해, 초기 2주 동안 필요한 혈액량을 산출했다. 결과는 냉정했다. 사상자 수는 약 8만명에서 15만명으로 추정되며, 그중 군인은 30%, 민간인은 15%가 수혈을 필요로 한다. 중상자 한 명당 평균 1.5~2.5리터의 혈액이 필요하다. 따라서 전쟁이 발발한 지 2주 안에 요구되는 혈액 총량은 36만~60만 리터로 계산됐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실제 비축량은 약 10만 리터, 즉 필요량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전쟁이 시작되면 피가 먼저 떨어진다는 의미다.
혈액의 유효기간은 짧고, 공급망은 느리다
적혈구 농축액의 유효기간은 42일, 혈소판은 단 5일이다. 미리 쌓아둘 수 있는 양이 근본적으로 제한된다는 뜻이다. 전시에는 채혈, 검사, 저장, 운송이 모두 동시에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포탄이 떨어지고 전력망이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 체계를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전투는 끝나기도 전에 피가 먼저 고갈된다.
피의 격차는 ‘수학’이 아니라 ‘사망률’이다
연구에 따르면, 전혈은 4만~8만 단위가 필요하지만 실제 보유량은 3만~4만 단위뿐이다. 적혈구 농축액은 10만~20만 단위가 필요하나 5만~8만 단위만 확보되어 있다. 신선동결혈장은 6만~12만 단위가 필요하지만 4만~5만 단위가 현실이다. 혈소판은 2만~4만 단위가 필요하지만 5천~1만 단위에 불과하다. 결국 각각 최대 4만, 12만, 7만, 3만 단위의 부족이 발생한다.
이 차이는 단순한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전투 현장에서는 그만큼의 생명이 사라진다는 의미다. 특히 혈소판은 유효기간이 단 5일에 불과해, 전쟁이 닷새만 지속돼도 전국 재고는 사실상 ‘제로’가 된다. 그때부터는 출혈 환자에게 아무리 응급 처치를 해도 지혈이 불가능하다. 전장의 두 번째 사망원인은 총탄이 아니라 ‘혈액의 부재’다.
피는 국가의 시간이다
많은 이들이 전쟁을 ‘물자의 싸움’으로 인식하지만, 실제로는 ‘시간의 싸움’이다. 혈액은 시간에 가장 민감한 자원이다. 총탄은 창고에 수년을 보관할 수 있지만, 피는 6주면 폐기된다. 따라서 전시 혈액관리의 핵심은 저장이 아니라 순환, 비축이 아니라 속도다.
대한적십자사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기준 한국의 연간 혈액 채집량은 260만 단위다. 이를 2주 단위로 환산하면 약 10만 단위 수준이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면 16만~30만 단위가 필요하다. 즉, 평시 체계로는 전쟁이 시작된 지 2주도 버티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헌혈 인구의 급감이다. 2050년에는 채혈량이 연간 140만 단위로 줄어들 전망이며, 반대로 의료 수요는 2045년 510만 단위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혈액 적자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전쟁 시 이 격차는 곧 사망률로 치환된다. 혈액이 부족하면 수술의 순서를 정해야 하고, 결국 ‘살릴 수 있는 사람부터 살리는’ 선택이 불가피하다. 의학적 판단이 아닌 물류적 한계가 생사를 좌우한다. ‘피의 시간표’가 곧 국가의 운명이다.
혈액 안보, 새로운 국방의 패러다임
전쟁이 나면 탄약보다 피가 먼저 떨어진다. 따라서 혈액은 단순한 의료용품이 아니라 ‘전략 자원’이다. NATO는 이미 2016년 혈액을 ‘전략적 자원(Blood as Strategic Resource)’으로 분류했다. 황건·박찬용 두 교수는 논문에서 한국 역시 ‘혈액 안보(Blood Security)’ 개념을 국방계획에 도입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국가의 전쟁 지속 능력은 병력 규모보다 피의 흐름이 결정한다.
피가 멈추면 전선이 멈춘다.
한국의 대비는 아직 초기 단계다. 전시 비축 목표는 10만 리터지만, 실전에서는 주당 15만~30만 리터의 보충이 필요하다. 이 격차를 줄이려면 평시부터 다층적인 준비가 필요하다.
두 연구자는 다섯 가지 해법을 제시했다.
첫째, 전쟁 전 혈액 비축 확대.
둘째, 이동식 혈액은행 구축.
셋째, 군·민 협력 체계 강화.
넷째, 미국과 NATO 등 동맹국과의 국제 공급망 구축.
다섯째, 구성요소 분리보다 전혈(whole blood) 중심의 수혈체계 전환.
특히 전혈 수혈은 이미 미군이 실전에서 검증한 방식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전혈은 구성요소 분리 수혈보다 생존률을 높이고, 응급상황에서도 훨씬 효율적이었다. 이제 우리도 실험실이 아닌 전장에 맞는 수혈체계를 준비해야 한다.
피 없는 전쟁은 없다
부상병들이 전투를 견딘 이유는 강철의 의지나 신념뿐 아니라, 단 한 봉지의 피 덕분이었다. 전쟁은 결국 피로 유지된다. 그 피가 떨어지면, 총과 포가 아무리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다. 전쟁의 시작은 총성이지만, 끝은 피의 고갈로 온다. 한국이 진정한 대비태세를 갖추려면, 탄약보다 먼저 피를 준비해야 한다. 피는 생명이고, 생명은 곧 안보다. 혈액이 충분히 준비된 나라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