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월 14일부터 16일까지 서울에서 세계공영방송(PBI) 총회가 열린다. KBS가 주최하는 이번 행사에는 영국 BBC, 일본 NHK를 비롯해 세계 약 40개국의 공영방송 경영진과 국제 미디어기구 관계자 200~300명이 참석할 예정이다. 세계 방송계를 이끄는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국제행사다.
나는 이 행사를 단순한 방송인들의 회의로 보지 않는다. 세계 각국의 여론 형성과 문화 전파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방송계 지도자들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K팝과 K드라마의 성공뿐 아니라 한국 민주주의의 경험, 문화적 역량, 기술 발전과 시민사회의 모습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자리다.
이번 총회의 주제는 ‘국가 문화 발전을 위한 공영미디어의 역할’이다. 공영방송이 국가의 문화와 정체성을 어떻게 지키고 발전시킬 것인지, 디지털 플랫폼과 인공지능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지를 논의한다. 국가와 사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참석자들의 면면도 눈길을 끈다. BBC와 NHK는 물론 프랑스 텔레비지옹, 캐나다 CBC, 미국 NPR, 유럽방송연맹(EBU) 등의 주요 인사가 참가한다.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몽골 등 아시아 방송계 지도자들도 서울에 모인다. 이들이 한국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은 각국 방송을 통해 다시 세계에 전달될 수 있다.
그런데 이번 총회에 이재명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고 김민석 국무총리가 참석할 예정이라고 한다.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다면 더욱 뜻깊겠지만, 국무총리가 정부를 대표하는 것도 국제행사에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KBS가 2018년 개최한 세계공영방송 서울총회에는 문재인 대통령 대신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해 축사했다. 당시에도 세계 주요 방송사 경영진 200여 명이 모여 디지털 미디어 환경과 공영방송의 미래를 논의했다. KBS는 2007년에도 이 총회를 개최한 바 있다. 올해가 세 번째 서울 개최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대통령의 직접 참석을 기대해볼 만한 이유가 있다. 한국의 국제적 위상과 문화적 영향력이 크게 높아진 시점이기 때문이다. 세계가 한국의 음악과 드라마, 영화와 문학에 주목하고 있다. 공영방송의 역할을 논의하는 자리는 이러한 문화적 성취를 세계에 소개하면서, 그 바탕에 있는 한국 사회의 역동성과 민주주의를 함께 설명할 기회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갈 문제도 있다. 이번 총회를 주최하는 KBS의 박장범 사장은 윤석열 정부에서 임명됐다. 그를 둘러싸고 공영방송의 정치적 독립성과 인사 절차 등에 관한 논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KBS 사장이 어느 정부에서 임명됐는지와 세계공영방송총회의 국가적 의미는 구분해야 한다. 대통령의 참석 여부가 KBS 사장과의 관계 때문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은 정치적 해석으로 국제행사의 의미를 좁힐 필요는 없다.
KBS는 특정 대통령이나 정부의 방송이 아니다. 국민의 방송이다. 사장 개인의 정치적 성향이나 임명 배경과 관계없이 공영방송이 수행해야 할 국가적·사회적 역할은 계속된다. 정권은 바뀌어도 공영방송의 공적 책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자리에서 대통령이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언론 자유에 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한다면 의미가 클 것이다. 공영방송이 권력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원칙을 국제사회에 직접 밝히는 것보다 확실한 의지의 표현이 또 있을까.
한국은 지난 몇 년간 심각한 정치적 갈등과 민주주의의 위기를 경험했다. 그 과정을 세계 언론이 지켜봤다. 이제 한국이 보여줘야 할 것은 갈등의 기억만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하고 제도를 회복하며 앞으로 나아가는지에 관한 경험이다.
세계 공영방송 지도자들에게 한국의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에 대해 설명하고, 서로의 경험을 나누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공공외교가 될 수 있다.
이번 총회에서는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한국의 문화와 정체성을 이야기하고, 가수 싸이가 K팝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소개할 예정이다. 참가자들은 한국 문화의 역사와 현대적 역동성을 함께 접하게 된다.
그러나 문화외교는 공연이나 전시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한국을 찾은 세계 언론인들이 이 나라의 민주주의와 언론 환경, 국민의 삶을 어떻게 이해하고 돌아가는지도 중요하다. 그들이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눈 대화, 현장에서 확인한 사실은 앞으로 한국을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나는 오랫동안 아시아 각국 언론인들과 교류하면서 한 가지 사실을 확인해왔다. 언론인 한 사람과의 진지한 만남은 때로 수많은 홍보자료보다 오래 남는다. 서로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신뢰를 쌓은 언론인은 자신이 경험한 나라를 더욱 깊이 바라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공영방송총회는 며칠간 열렸다가 끝나는 국제회의에 그쳐서는 안 된다. 한국 방송계가 각국 공영방송과 협력관계를 넓히고, 우리 문화와 사회에 대한 이해를 높이며, 장기적인 콘텐츠 교류와 공동제작으로 연결하는 출발점이 돼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이 일정을 조정해 총회에 참석할 수 있다면 좋겠다. 개막식에서 짧은 환영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한국 정부가 세계 공영방송과 문화교류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전달할 수 있다. 대통령이 세계 공영방송 경영진에게 한국의 언론 자유와 민주주의,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비전을 직접 밝힌다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직접 참석하기 어렵다면 영상 메시지나 별도의 교류 기회도 생각해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참석 자체만이 아니다. 정부가 이번 행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세계 공영방송 지도자들과의 만남을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한 기회로 얼마나 활용하느냐에 있다.
KBS에도 당부하고 싶다. 이번 총회를 방송사 차원의 국제행사로만 운영하지 않았으면 한다. 세계 각국 참가자들이 한국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정부와 국회, 문화계와 시민사회가 함께하는 폭넓은 교류의 장으로 발전시키기 바란다.
세계 공영방송의 지도자들이 서울에 온다. 그들이 한국에서 가져가야 할 것은 K팝의 흥겨움과 K드라마의 인기만이 아니다. 민주주의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언론의 자유와 문화의 다양성을 지켜가려는 대한민국의 모습이어야 한다.
정권은 바뀌어도 대한민국은 계속된다. 세계가 서울을 찾아오는 기회를 국내 정치의 논란에 가두지 말자. 국가의 품격은 서로 다른 입장과 갈등을 넘어 공공의 가치를 위해 함께할 때 드러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