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려인 청소년 대부분은 성장 과정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중도입국 이주배경청소년이다. 이들에게 낯선 한국 문화와 서툰 한국어는 일상에서 끊임없이 마주해야 하는 장벽이자 스스로 넘어야 할 높은 산이다. 그러나 한국의 이주배경청소년 교육은 때때로 이들이 살아온 시간과 문화적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기보다 한국 사회에 빠르게 동화되기를 요구한다. 낯선 환경에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만으로도 벅찬 아이들에게 한국의 학교생활은 또다시 “빨리 적응해야 한다”고 재촉하는 공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가을 햇살이 따뜻하다. 어느새 하늘은 한층 높아졌고, 흰 구름도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맑고 가까워졌다.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 고려인 청소년들과 함께 서울 나들이에 나섰다. 따뜻한 햇살을 품고 높은 하늘의 구름을 따러 가듯 가벼운 마음으로 길을 나섰다.
오늘의 나들이는 단순히 날씨가 좋아 떠나는 일상적인 외출이 아니다. 빡빡하고 고단한 한국 생활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껏 보고 느끼며 가슴속에 새로운 이야기를 채우는 현장체험학습이다.
한국 청소년들은 주말이나 방학이면 부모와 함께 여행을 떠나며 자연스럽게 여러 지역과 문화를 경험한다. 그러나 고려인 청소년들에게는 그런 기회가 녹록지 않다. 낯선 땅에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부모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바쁜 노동 때문에 자녀와 함께 여행할 여유를 갖기 어렵다.
그렇기에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의 현장체험학습은 때로 부모의 빈자리를 대신한다. 다른 청소년들에게는 익숙한 경험이 우리 아이들에게는 부러움으로만 남지 않도록, 비록 충분하지 않더라도 한 곳이라도 더 보여주고 한 가지라도 더 경험하게 해주고 싶다. 아이들이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더 큰 꿈을 품을 기회를 만드는 것, 그것이 이 아이들을 맡은 나의 의무라고 생각한다.
바로 오늘이 그런 날이다.
단체버스를 타고 정해진 장소만 둘러보는 수동적인 체험학습은 로뎀나무국제대안학교에서 좀처럼 하지 않는다. 한국의 모든 것이 새롭고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은 고려인 청소년들에게는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환승하고, 모르는 사람에게 길을 묻고, 약속된 시간에 집합 장소를 찾아오는 모든 과정이 하나의 교육이자 모험이며 도전이기 때문이다.
팀별로 약속 장소를 찾아오는 아이들은 멀리 버스정류장 너머에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길을 잃지는 않았을까, 버스를 잘못 타지는 않았을까,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제대로 요청할 수 있을까. 현장체험학습을 진행할 때마다 걱정과 기도가 앞선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을 혼자 감당할 수는 없다. 아이들의 이동 경로와 동선을 꼼꼼히 살피고 체험 미션까지 곁에서 함께해 주는 오필준 부장선생님과 박진주 부장선생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약속 시간이 되자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용산 전쟁기념관이다. 전쟁의 흔적과 마주한 아이들의 얼굴에는 평소와 다른 진지함이 묻어났다. 전시된 무기와 기록, 전쟁 속 사람들의 이야기를 바라보는 눈빛도 사뭇 깊었다. 아이들이 전쟁을 단지 먼 과거의 사건으로만 기억하지 않기를 바랐다. 눈앞에 펼쳐진 흔적을 통해 우리가 누리는 평화가 얼마나 귀한지 깨닫고, 그 평화를 지키며 한국 사회의 책임 있는 구성원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했다.
한국 청소년들에게는 눈으로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비교적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는 그렇지 않다. 낯선 단어 앞에서 한참을 멈춰 서기도 하고, 선생님에게 뜻을 묻기도 하며, 휴대전화 번역기를 이용해 문장을 하나씩 이해해 나갔다. 전시실 곳곳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은 단순한 관람객의 모습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한국의 역사와 언어를 동시에 배우며 자신들이 살아갈 사회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때 저만치에서 이리나 조(레브, 니콜라이)가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 앞에 오랫동안 서서 무언가를 적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잠시 후 이리나는 곁에 있던 한 노신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궁금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빨라졌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 노신사는 국가보훈부 초청으로 전쟁기념관을 방문한 국가유공자이자 재미동포였다. 살아온 시대도, 사용하는 언어도 달랐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따뜻한 공감이 흐르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강제이주의 역사를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전해 들으며 자란 고려인 청소년들에게 한국에 대한 정체성은 때로 희미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 한민족의 뿌리가 자리하고 있는 듯했다. 이리나는 노신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낯선 어른에게 먼저 말을 걸고 서툰 한국어로 대화를 이어가는 그 순간은 교실에서는 배울 수 없는 살아 있는 한국어 수업이자 자신의 뿌리를 만나는 특별한 시간이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들에게 더 많은 체험과 만남의 기회를 만들어 주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왔다. 이번에도 모든 아이를 데리고 나오지 못했다. 비용 때문이다. 아이들이 적어도 한 해에 서너 차례는 마음껏 현장체험학습에 참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공모사업을 통해 체험학습 기회를 마련해 주는 선생님들에게 고맙고 한편으로는 미안한 마음도 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른 전시실에서 미션을 수행하고 있을 아이들을 찾아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가을 햇살은 전쟁기념관의 넓은 뜰 위로 오래도록 머물렀다. 아이들은 저마다의 속도로 한국의 역사와 마주하고, 사람을 만나고, 낯선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그렇게 가슴속에는 오늘의 기억이 한 장의 사진처럼 차곡차곡 쌓여 갔다.
아이들에게 오늘은 단순한 서울 나들이가 아니었다. 한국 사회를 배우고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며 내일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딛는 시간이었다. 체험학습의 하루는 지나갔지만, 그날 보고 듣고 느낀 경험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새로운 꿈의 씨앗이 되어줄 것이라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