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노년의 하루가 궁금하다. 그래서 이따금씩 물어본다.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했다. “오전이면 주민센터에 가서 요가와 명상을 하지. 퇴직 하고 오카리나를 십년 넘게 연습했어. 이제 조금은 알 것 같아. 팀을 짜서 버스킹 연주로 봉사활동을 하고 있어.”
나름대로 루틴을 만들어 바쁘게 살고 있다. 또 다른 친구에게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았다.
“새벽에 무료 급식소로 나가서 무 썰고 파 다듬어. 그렇게 만들어진 도시락을 쪽방촌에 배달해. 아픈 노인들은 얻어먹으러조차 올 수가 없잖아? 가보면 햇빛 한점 안 들어오는 어두침침한 좁은 방에 사는 사람들도 많아.” 그는 젊은 시절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과 뒤늦게 만나고 있는 것 같았다.
나에게 법률상담을 왔던 한 고교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법대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들어가 평생 해외 현장을 돌아다녔어. 영어계약서를 쓰는 게 일이었죠. 퇴직 하고 신학을 하고 싶어 신학대학원에 들어갔어요. 철학과 문학을 하는 것도 내 소망이었어. 내가 하고 싶은 공부들을 하고 있어. 퇴직을 하고 늙으니까 정말 자유로운 것 같아. 출세할 일도 없고 경제생활도 다 했고 말이죠.”
10여년 전 한 선배 변호사로부터 이런 얘기를 들은 게 나의 메모 수첩에 적혀 있다. “변호사 일을 비교적 일찍 접고 경주 불국사 앞에 노후의 거처를 정했죠. 젊은 시절 책을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어서 일찍 은퇴한 셈이예요. 20년 동안 2천권 정도를 읽었어요. 앞으로도 읽을 게 산더미 같이 쌓였어요. 지금은 영주 부석사 근처로 숙소를 옮겼어요.”
대단한 에너지를 가진 사람 같았다. 그는 일도 하는 것 같았다.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작은 알바를 해요. 법률신문에서 만들어 놓은 원고를 요리사처럼 맛을 봐주기도 하고 글을 써주기도 해요. 작은 신문이라도 이게 만만치 않습니다. 사설을 한번 쓰면 법무부에서 법원에서 막 항의 전화가 걸려오는 겁니다. 언론의 자유가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대로 쓰는 게 아니에요.”

백살이 넘은 김형석 교수에게는 세월이 정지된 것 같다.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누가 내 나이를 말하면 벌써 그렇게 됐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살아온 날이 길게 느껴지지 가 않아요. 보통 노인들은 하루는 길고 일년은 빨리간다고 그래요. 하루가 길다는 것은 할 일이 없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나는 일이 많아요. 강연 나가고 글을 써요. 몇십년째 일기를 쓰고 있는데 쓸 때면 작년 재작년 그날의 일기를 먼저 읽어 봅니다. 내 사고력이 재작년 작년보다 올라갔나 내려갔나를 살펴보는 거죠. 일기 분량도 노트 한페이지씩 써요. 같은 일상의 반복이라도 가령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뉴스를 보면서 내 나름대로 생각하는 걸 써요. 그렇게 하면 글을 쓰는 능력도 유지되죠.”
노인이 돼도 현명한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보람 있고 좋아하는 활동에 몰입하는 것 같다.
내 나이 40대 초쯤이다. 법원에 갔다가 판사인 고교 선배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다. “내가 경제적으로 약간의 여유만 있다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밥을 사면서 그들의 얘기를 들으면 좋을 것 같아. 신문이나 잡지를 보고 그 지혜를 얻고 싶은 사람이면 찾아가 만나는 거지.”
그 아이디어를 내가 실행하기로 했다. 틈틈이 다양한 분야의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사람들의 경계심을 희석시켜 주는 장점이 있었다. 그들의 말을 귀 기울여 듣고 보석 같은 한마디가 있으면 수첩에 적었다. 그들이 경험하고 무심히 던지는 한마디는 살아있는 지혜였다. 장독 속의 된장같이 그것들을 세월 속에서 숙성시켜 노년에 형상화하는 작업을 하면 괜찮을 것 같았다.
세월이 흐르고 나는 스스로 백수가 됐다. 요즈음 오래된 수첩들을 꺼내어 그 속에서 와글거리는 말들을 꺼내 본다. 말들이 숙성이 되어 깊은 맛이 우러나는 것 같다. 많은 분들이 저세상으로 갔다. 자기가 했어도 어떤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 같기도 하다.
아침 신문에서 퇴직한 지 4년이 되는 한 교수의 글을 읽었다. 백수가 되니까 스스로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오히려 풍요롭게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는 ‘홀로 충만하게’ 지내는 능력이야말로 좋은 삶의 잣대이자 퇴직한 백수를 자유인으로 승격시키는 놀라운 삶의 비밀이라고 했다. 그 칼럼을 읽고 낡은 수첩 들 속에서 홀로 충만하게 사는 노년의 모습들을 찾아보았다. 그걸 반죽 삼아 오늘도 나는 글 빵을 만들고 있다. 맛은 심심 하지만 영혼을 건강하게 만드는 빵을 만들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