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우 안성기가 죽었다. 73세. 나와 비슷하다. 집에서 밥을 먹다가 쓰러졌다고 했다. 음식물이 목에 걸렸다.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은 돌아오지 않았다. 6일 후 숨을 거뒀다.
어린 시절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그는 내게 친숙한 소년 얄개였다. 몇 년 전 ‘종이꽃’이라는 영화를 봤다. 화면에 인상이 흉측한 염쟁이 영감이 나타났다. 섬찟했다. 그가 안성기라는 걸 알아차리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의 늙은 얼굴은 나의 거울이었다.
같은 또래의 그와 나는 유학 열풍에 공중에 떠 있던 기러기 아빠였다. 그는 두 아들을 유학 보내고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산 것 같다. 대학을 마친 장남은 미국에 정착했다.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귀국했지만 그는 이미 의식이 없었다. 나도 딸과 아들을 일찍 유학 보냈다.
혼자 지낸 시간이 많다. 술을 마시고 밤늦게 들어와 마루에 엎어져 잔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 정신을 차려보니 바닥에 토사물이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고, 나는 옷을 입은 채였다. 아이들도 힘들었다. 아파서 병원에 가 하루 종일 기다릴 때 아빠는 옆에 없었다고 했다. 길거리에서 소리를 질렀다고 백인 경찰이 몽둥이로 두드려 팰 때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 옆에 있어주지 못해 지금도 미안하다. 그리고 화가 나기도 한다. 남들은 흰눈으로 비웃지만, 이것이 기러기 가족의 아픔이 아닐까.
그런 내게 안성기에 대한 기억이 하나 있다. 나는 영화 ‘남부군’과 ‘부러진 화살’을 만든 정지영 감독과 변호인과 의뢰인의 관계로 시작해 자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배우 안성기와 친한 사이였다. 하루는 정 감독이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젊고 뜨는 배우들은 영화 개런티가 엄청 높아. 그런 아이들보다 훨씬 연륜이 있는 안성기는 비교하는 성격이 아니야. 후배들보다 자신의 출연료가 낮아도 그걸 감수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여.”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배우나 나 같은 변호사나 자신이 상품이 된다. 그리고 가격이 매겨진다. 대중과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연예인이 스스로의 가격을 낮추는 일은 쉽지 않다. 내 경우 자존심상 싸구려가 되는 게 싫어서 사건을 맡지 않은 적도 있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오래 한다는 건 잘한다는 뜻이 아니라, 버텼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성기는 한국 영화계 호황기에도 출연료에 상한선을 두었다고 한다. 다른 배우들이 회당 1억, 2억을 받을 때 그는 “일정 금액 이상은 절대 받지 않는다”는 원칙으로 유명했다. 한국 영화를 위해 그는 TV 드라마 출연을 자제했다. 돈이 되는 일을 거절했다.
나도 돈의 노예가 되지 않기 위해 조심했다. 한 재벌 회장이 호의를 보이며 알아서 돈을 주겠다고 한 적이 있다. 나는 사양했다. 그러면서 일한 시간만큼만 품값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나를 지키는 방법으로 괜찮았다.
2021년 안성기는 암 투병 중에 서울성모병원에 1억 원을 기부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들을 돕기 위해서였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내면에서 피어오르는 따뜻함이 보수였다. 세상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안성기를 향한 세상의 시선이 그랬다. ‘국민배우’, ‘완벽한 사생활’, ‘스캔들 제로’. 그러나 그 완벽함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그가 69년을 일했지만 자기답게 산 시간은 얼마나 됐을까. 오랜 시간 떨어져 살았던 아들에게 그는 어떤 아버지였을까. 외국에서 사는 아들에게 나는 추억을 함께한 좋은 아버지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사생활에 손가락질받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모범적이어서라기보다 세상의 눈을 두려워하는 겁쟁이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나는 동해 바닷가에 산다. 언젠가 나도 마지막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때 나는 혼자일까, 함께일까. 더 중요한 질문이 있다. 나는 지금 나답게 살고 있는가. 40년을 변호사로 살고, 이제 글을 쓴다. 이것이 나의 길이었을까.
안성기의 죽음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묻는다. 일흔 살의 인생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