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수의 경제토크] 아르헨티나·필리핀 경제 왜 망했나
아르헨티나와 필리핀은 왜 망했을까. 전 세계 경제학자들이 늘 관심 갖는 의문이다. 잘 나가는 나라에서 한 정파가 다른 정파를 공격할 때 두 나라가 등장한다. 너희 같은 놈들 때문에 이 나라가 필리핀, 아르헨티나처럼 되는 거야…‘뭐처럼 되라’는 욕에서 바로 ‘뭐’에 해당하는 저주가 된 것이다. 재미있는 건 듣는 사람들이 그게 왜 욕인지도 모르고 그냥 싫어한다는 점이다.
20세기 초 선진국 중 선진국이었던 아르헨티나가 왜 요즘은 비실비실, 쿠데타나 자꾸 일어나고, 빚 못 갚아서 ‘배째라 상태’(국가디폴트)에 정기적으로 들어가고, 하이퍼 인플레이션도 가끔 일어나고 그런가.
1950년대만 해도 한국 사람들이 선진국 연수 갈 때 1순위였고, 그린 레볼루션(농업혁명)의 선두주자였고, 막사이사이상 타면 노벨상에 버금가는 영광이었고, 요즘 헐고 다시 짓는 장충체육관도 지어주었던 그 영광스럽던 필리핀이 어째서 ‘가정부 파견 종주국’(필리핀 외교관들은 주재국에서 수난 당하는 필리핀 가정부 인권보호가 주요업무)에서 못 벗어날까.
최근에 아르헨티나 케이스를 잘 정리한 글이 실렸다. 경제에 관심 있다면 반드시 읽어야 할 분석이다. 내 나름대로 아르헨티나 몰락 이유를 따져본다.
첫째, 가진 자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자원을 기반으로 경제구조가 형성됐는데, 그 자원 가격이 내려갔다. 아르헨티나는 소고기가 많이 났다. 소고기 냉동 수출로(주로 영국으로) 세계적인 부국이 되었다. 그런데 너도나도 다 소를 키우기 시작했다. 소 키우려니 말 잘 듣는 목동들이 많이 필요했고, 그래서 대중교육을 소홀히 했다. 한국처럼 목숨 걸고 고등교육 시키지 않았다. 고등교육은 상류층만의 전유물이었다. 반면에 한국은 다음 세대 먹을거리를 절묘하게 잘 찾았고, 적시에 고급인력이 있었다. 요새 삼성에 취직하면 동네 경사라고 하는데, 그만큼 고급인력이 풍부하다는 거다. 내가 보기에 고급인력에 관한 한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이 한 수 위다.
둘째, 자유무역주의를 써야 할 때 쇄국정책을 썼고, 쇄국정책(보호무역주의)을 써야 할 때 자유무역주의를 썼다. 경제관료가 띨띨했던 것이다. 반면에 한국은 그 타이밍을 절묘하게 잘 잡았다.
셋째, 한국에서 재벌 편중, 경제 양극화가 문제로 자주 지적된다. 아르헨티나는 그런 얘기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경제가 이분화돼 있다. 한쪽은 완전히 귀족·제왕에 가깝다. 절대 해결 안 된다. 혁명이 여러 번 나도 요지부동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대중이 부족하고 시민적 소양이 취약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남아공은 이 문제를 성숙하게 해결했다. 만델라라는 불세출의 영웅 덕분이긴 하지만.
극단적 사회 양극화도 한 몫
넷째, 연속되는 군부 쿠데타에다 페론주의자들의 낭만적 복지정책이 걸림돌이 됐다. 사실 쿠데타로 정권을 휘어잡은 군인들이 경제를 잘 살리기만 했으면 오히려 안정되게 성장할 수도 있지 않았나 싶다.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이 그랬고, 한국의 제3공화국이 그랬다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유능하고 청렴한 공무원집단이 있어야 한다. 그거야 그 사람들 국내 문제고, 밖에서 결과론 적으로 보기에 아르헨티나는 어떤 형태로든, 무슨 문제든 장기적 정책을 꾸준히 펼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다섯째, 국제 금융시장에다 ‘배째라’를 너무 자주 했다. 고리대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러니 얼마 안 가 다시 디폴트에 빠지고 이자는 더 오른다. 산업이 클 수가 없다.
여섯째, 2차 대전 때 중립정책을 폈다. 독일 사람들이 많이 살아서였다. 나치들 가운데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국제적,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아르헨티나를 손 보겠다는 묵계가 있다는 소문과 추측이 있다. 음모론으로 아르헨티나 역사를 설명하는 사람도 많다. 역사적으로 주위 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 이상하게도 남미 사람들이 아르헨티나를 싫어한다. 가장 먼저 잘 살아서 주위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랬지 않나 싶다.
일곱째, 이민정책이 잘못 됐다. 이민 와서 열심히 일하고 새 산업을 일으키고 그래야 하는데, 소비형 이민에 결국 연금만 축내는 결과가 돼 버렸다.
필리핀에 관해서는 아직 데이터에 근거한 공부가 부족하다. 겉으로 알기에 필리핀은 마르코스 장기독재 기간 중 여기저기 시장을 왜곡시켜 경제가 힘을 잃은 것 아닌가 싶다. 내가 늘 하는 주장인데, 독재자가 쫓겨날 때 차라리 중앙은행 금고에서 금 덩어리를 훔쳐서 외국으로 도망가는 것이 국민들에게 피해가 덜하다. 요상한 방법으로 시장체계를 왜곡시켜 놓고, 언론자유나 사법정의 같은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추상가치들을 박살 내놓고, 시민정신을 말살시켜 놓는 폐해는 아주 깊고도 길다. 마르코스 시절 정치가 망가지면서 기업의 흥망이 시장 아닌 정권과의 친소관계로 정해지는 시절이 오래 지속돼 왔다.
여기서 내가 묻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렇게 비실비실함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와 필리핀 사람들은 어찌 그리 행복해 보일까. 우리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고 만사에 여유가 있다. 말하는 것부터 폼 난다. 문예가 발달했다. 아르헨티나만 해도 자연경관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리고 그 스테이크, 아르헨티나에 살다 온 분들은 소고기 먹을 때마다 꼭 “아르헨티나에서 먹던 것에 비하면…” 이란 말을 한다. 축구, 탱고, 와인에 골목마다 일요일마다 축제에, 미인대회가 열린다. 필리핀 사람들도 마찬가지. 늘 웃는 모습이다.
뭐가 진정으로 잘 사는 건지, 답은 아무도 모른다. 한국도 엄청 잘 나가는 몇몇 기업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지금껏 한국은 이래서 잘 됐고, 아르헨티나는 저래서 망했다는 분석이 얼마나 낯 뜨거워질까. 가까운 일본도 자기네는 왜 잘 살고, 아르헨티나는 왜 못 사는지 숱하게 분석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아르헨티나로 이민 간 일본 사람들의 슬픈 운명의 장난을 내용으로 한 연속극까지 나왔다.
참고만 하자. 결론은 내리지 말자. 이것이 모든 사회과학의 유일한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