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한의 ‘이중징용’…“우리 다 죽기 기다리나”

‘강제동원 현장’ 러시아 사할린을 가다

11월의 러시아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에는 벌써 한겨울의 스산한 바람이 분다. 겨울 대비라도 하기 위함인지 묘지에 서식하는 까마귀 떼가 가쁜 비행을 거듭한다.

그러나 그들의 법석과는 달리 남편이고 아버지인 고 원수원 씨 묘를 찾은 두 여인은 보드카 한 병과 방울토마토 3알, 그리고 초콜릿 3개를 놓고 조용히 절을 올린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원기연(76) 씨는 인천시 남동구 논현동에서, 큰딸 원영순 씨는 러시아의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날아왔다. 유즈노사할린스크는 그들이 서로의 시공간으로 흩어지기 전 살던 곳이다.

“저는 2007년 10월 초이렛날 한국으로 영주귀국 했어요. 그 뒤로 2년에 한 번 정도 이렇게 자식들하고 남편 묘를 찾아요. 자식으로는 같이 온 의학박사인 큰딸과 그 아래로 셋이 있어요. 아버지가 없었지만 애들이 공부는 참 열심히 했지요.”

유즈노사할린스크 남쪽에 있는 제1공동묘지 주변을 지나다 만난 원기연 씨 모녀.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개인사를 넘어 사할린 한인의 역사, 나아가 우리가 역사를 바라보는 태도에 대해 깊은 성찰을 촉구하는, 가슴 저린 고발이었다.

일제 때 러시아로 징용 온 고 원수원 씨 묘 앞에 부인과 딸이 가져온 보드카와 방울토마토, 초콜릿이 놓여 있다.

원기연 씨는 일본정부 지원(2010년 7월 현재 700여억 원)으로 2000년 2월부터 시작한 ‘사할린 한인 영주귀국 사업’을 통해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다만 자녀들과 함께 온 것이 아니라 서로 남남이던 다른 여성과 함께 영주귀국 해야만 했다. 규정상 ‘2인1조’여야 신청이 가능해, 원 씨처럼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냈거나 이혼을 했거나 애초부터 독신이었던 이들은 다른 사람과 짝을 이뤄야만 신청을 할 수 있었다.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 날이 더 적은 이들이지만 이렇게 대학교 기숙사처럼 2인1조로 무작정 짝을 지어야 영주귀국 할 수 있도록, ‘고국’은 규정하고 있다. 그마저도 ‘1세’나 ‘1세와 함께 사할린으로 넘어왔거나 해방 전 태어난 2세’만 영주귀국을 할 수 있기에 원기연 씨의 딸 영순 씨와 같은 3세에게는 신청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고국에 의해 ‘신(新) 이산가족’이 생기고 있는 셈이다.

그나마 영주귀국을 했다고 해도 그 삶은 한겨울 사할린의 풍설(風雪)만큼이나 강퍅하기 그지없다. 영주귀국자의 대부분이 노년층이기에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로 지정되어 1인당 매달 약 34만 원의 보조금을 받기는 하나 주택임대료에 각종 공과금를 제하면 수중에 남는 돈이 거의 없다. 지난 2008년 1월 노령연금법이 개정되면서부터는 8만4000원 정도의 연금마저 끊긴 실정이다. 그래서 누군가 이를 두고 ‘2인 1실짜리 반(半)수용소 생활’이라고 자조하기도 한다.

원기연 씨가 이처럼 ‘국민이되 비(非)국민’ 같은 처지가 된 연유를 알고자 한다면 그 자신의, 그리고 우리의 역사가 한층 비극적이던 19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윈기연(왼쪽) 씨와 원영순 씨 모녀. 그들의 개인사는 사할린 한인사를 넘어 우리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슴 저며지는 고발이었다.

꿈에 그리던 영주귀국, 그러나…

“41년 가을인지 42년 봄인지 정확히 기억 안 나지만, 그때 우리 가족은 경남 통영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삭쬬르스크로 징용돼 간 거예요. 아버지가 징용된 이듬해 어머니와 저, 그리고 동생 둘도 삭쬬르스크로 왔고요.”

일제 때 ‘토로(塔路)’라 불렸던 삭쬬르스크는 사할린 섬 중서부에 있는 도시로, 일본이 지배하던 시절 조선인을 강제동원해 석탄을 채굴하던 곳으로 악명 높던 곳이다. 일제는 당시 ‘모집’ 혹은 ‘관(官) 알선’이라는 이른바 ‘자원’ 형태를 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조선의 경제구조는 일제에 의해 왜곡된 상태였기에 밥벌이를 위한 선택지가 없었고, 설령 모집에 ‘자원’해 사할린에 왔다고 하더라도 조선인은 일신의 자유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폭압적 노동착취를 당해야 했다. 그렇기에 원 씨 말마따나 이곳 조선인들의 삶이란 ‘노예생활’에 다름 아니었다.

원 씨의 아버지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8월 사할린에서 일본 본토의 정반대편에 있는 큐슈로 다시 징용되고 만다. 미군 잠수함에 의해 사할린과 홋카이도 간 물류가 힘들어져 고안해낸 이른바 ‘이중징용’이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1945년 초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졌을 뿐이다.

아버지 없이 사할린에 남아 살아야 했던 60여 년 세월. 원기연 씨는 최근 아버지를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자신이 그의 딸임을, 아버지와 자신이 강제동원의 피해자임을 증명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가 할 수 있는 ‘아버지를 위한 작지만 의미 있는 명예회복’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마저도 쉬운 일은 아니다.

러시아 사할린 섬에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 공항엔 벌써 눈이 내려 삭막한 느낌을 자아낸다.

“저는 지금은 원 씨로 살고 있지만 결혼 전에는 황 씨였어요. 원기연이 아니라 황기연. 그런데 1953년 결혼을 하면서 소련 법대로 남편 성을 따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남편이나 저나 자식들이나 모두 원씨예요.”

바로 그런 이유로, 그나 그의 아버지 모두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가 될 수 없었다. 호적등본에 ‘황덕부의 딸 황기연’이라고는 적혀 있었지만, 동사무소에서는 “당신은 법적으로는 황기연이 아니라 원기연이기 때문에 호적등본은 떼어줄 수 없다”고 했다. 호적등본을 뗄 수 없으니 강제동원 피해자 신청조차 할 수 없었다. 법원에 가서 성을 원 씨에서 황 씨로 다시 바꾸면 호적등본을 떼어줄 수 있다고 하지만, 원 씨는 “그것은 제가 할 일이 아니라 정부가 먼저 나서서 해줘야 하는 최소한의 서비스이자 역사적 책임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아버지 없이 산 69년, 조국은 어디에”

“2세인 우리도 벌써 70~80대 노인들이에요. 조금 있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은 다 죽는데, 한국정부는 이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다 죽을 때까지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건가요?”

비슷한 이유로, 부친이 사망한 뒤 모친이 새 결혼을 해서 성이 바뀐 사람들과 그 모친 등도 정부 지원대상에서 일찌감치 멀어져 있는 상태이다. 법 적용 대상을 명확히 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그런 관료주의로 인해 일제에서 해방이 되었음에도 해방되지 않은 인생들이, 우리 주변에 적지 않다.

사할린 풍경도 이제 많이 달라졌다. 원기연 씨의 딸 원영순 씨가 그렇듯 3~4세에 이르러서부터는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이가 기하급수적으로 줄고 있다. 1960년대 초까지 32개나 있던 조선학교가 모두 문을 닫은 데다, 러시아인과의 결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한인 공동체성은 그만큼 옅어지고 있다.

유즈노사할린스크 제1공동묘지는 택지개발이 예정돼 있어 언제 사라질지 알 수 없다.

이를 테면 원 씨는 이중징용으로 통한의 삶을 살아야 했던 아버지, 그리고 일제 치하 조선에서 함께 온 아이 셋에 이곳에서 낳은 유복자까지 4명의 자식을 아비 없이 홀로 기른 어머니의 묘마저, 이제는 찾기 힘든 지경이 되었다. 대도시인 유즈노사할린스크와 달리 그가 이전에 살던 삭쬬르스크의 규모가 소읍마냥 줄어들면서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역시 급감했다. 묘지를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어졌다는 얘기이다. 묘지는 울창한 숲으로 변한 지 오래인 데다 나무로 만든 묘비마저 썩어 지금은 흔적조차 찾기 힘들다고 한다. 원씨는 “못난 자식, 부모 묘도 못 찾고 이렇게 살고 있다”며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이 어디 삭쬬르스크만의 문제일까. 이제 남편의 묘가 있는 이 공동묘지도 얼마 안 있어 영영 사라질 판이다. 택지개발이 예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격년으로 묘를 찾아 남편을 만나고 가지만, 다음 방문 때 이 묘가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저 한평생 살아온 것 마냥 시대와 세월에 맡겨야 할까? 그저 야속할 뿐이다.

우연히 마주친 원 씨 일행과의 대화를 끝낸 나는 자리를 떠야 했다. 그때 원기연씨가 제물로 놓았던 초콜릿을 건넸다. 초콜릿 속에는 사할린 명물이라는 산딸기 잼이 가득 들어 있었다. 언젠가 들은 적 있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굶주림에 지칠 때면 몰래 따먹었다는 산딸기가 바로 이런 맛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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