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미군기지 예정지 ‘헤노코’…반전평화 메시지 ‘사키마미술관’을 가다
인천에서 비행기로 2시간 남짓 걸리는 일본 최남단 오키나와현(沖??). 160여 개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오키나와현 한 가운데 위치한 이 마을은 인구 1500명 정도의 작은 어촌이다. 주민들은 어업이나 농업 등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다.
앞 바다는 거의 전체가 산호초로 뒤덮여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자랑한다. 특히 해초류만 먹고 자라는 ‘듀공’이 살고 있어 여행자들의 눈길을 끈다. 듀공은 바다사자나 물개와 비슷한 포유류로 전 세계를 통틀어 서식지가 몇 없다 보니 세계자연보전연맹에 의해 멸종위기종으로 지정돼 있다.
듀공 서식지 근처에 울창한 숲이 하나 있다. 그 면적은 섬 전체의 10%, 일본 본토에 비해서는 고작 0.1%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같은 면적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 숲에 사는 식물종은 본토보다 45배 많고 동물은 무려 51배나 더 많아 가히 ‘동식물의 천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중요한 곳이기 때문일까? 정부나 지자체는 물론 이 마을에 살고 있는 주민들조차 손을 대지 않고 그저 지켜보기만 할 정도로 조심스럽게 보호하고 있다. 그다지 크지 않은 이 섬마을 이름은 ‘헤노코(?野古)’다.
문제는 지난 2006년 이래 주일미군과 일본정부가 이곳에 해상 공군기지를 지으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점이다. 충분한 설명이나 설득 없이 막무가내로 떠안기듯 군기지 건설을 추진하다 보니 주민 반발이 거세다. 헤노코 주민들은 물론 오키나와 각지에서 온 주민들이 군기지 건설이 예정돼 있는 해변에 천막을 친 채 하루 24시간 농성을 시작한 지 10월 말로 3400일을 기록했다.
‘동식물의 천국’에 닥친 위기
오키나와 사람들이 그토록 군기지 건설에 반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헤노코에서 남서쪽으로 약 39km 떨어진 기노완(宜野?)이라는 도시를 찾았다. 기노완은 도시 모양부터 참 특이하게 생겼다. 정중앙에 미 해병대의 후텐마(普天間)기지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고, 시가지가 그 주변을 마치 도넛처럼 빙 둘러싸고 있다.
그런데 그 경계지점에, 그러니까 3면이 미군기지의 철조망으로 둘러쳐진 위치에 미술관이 하나 자리잡고 있다. 지난 1994년 문을 연 ‘사키마(佐喜眞)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의 사키마 미치오(佐喜眞道夫) 관장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이 미군기지에 수용되자 그 지대(地代)로 받은 돈으로 미술작품을 구입하기 시작했고 결국 미술관까지 세우게 됐다고 했다. 그는 “일본인들은 오키나와는 물론 아시아에 대한 침략 사실과 현재까지 오키나와에서 지속되고 있는 일본의 식민주의적 행태를 잊고 있다”며 “그런 불감증을 깨기 위해 미술관을 세웠다”고 힘줘 말했다.
사키마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반전과 평화, 그리고 인권에 대한 것들이다. 예컨대 미술관의 대표 작품인 마루키 이리(丸木位里)와 토시(俊) 부부의 1988년작 <오키나와 전쟁도(沖??の?)>는 파블로 피카소의에 비견될 정도로 전쟁의 참혹함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한 마디로, 군기지라는 전쟁 도구에서 나온 돈이 평화를 호소하는 예술로 승화되고 있는 ‘역설의 현장’이다.
미군기지 철조망 앞에 세운 미술관
아름다운 자연환경 덕에 ‘아시아의 하와이’라 불리기도 하는 오키나와. 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마치 제2차 세계대전이 아직도 끝나지 않은 양 전쟁의 참혹함이 여전한 곳이다. 애초 오키나와에는 ‘류큐(琉球)’라는 독립국가가 있었다. 해상무역을 통해 오래도록 번영을 누렸고, 조선과도 선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데 17세기 초 일본 사츠마(薩摩)번의 침략을 받은 이후 1879년에는 아예 일본의 일개 현(?)이 돼버리고 만다. 지금의 오키나와현이다.
아픔의 역사는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2차 대전 당시 유황도를 제외한 현재 일본 영토 가운데 유일하게 지상전을 겪은 곳이 바로 오키나와다. 한국전쟁이 그랬듯, 아니 인류가 저지른 거의 모든 전쟁이 그랬듯이 전쟁의 최대 피해자는 민간인이었다. 오키나와도 예외가 아니었다. 20만 명 가까운 희생자 가운데 절반인 10만 명이 민간인이었다.
민간인 피해가 컸던 이유는 일본군이 노인은 물론 소년소녀 마지막 한 사람까지 싸우기를 강요한 데다, 미군 포로가 되기 전에 스스로 자결하라는 명령을 내린 나머지 아버지가 부인을, 형이 동생을 죽고 죽이는 아비규환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사키마 관장이 미군기지 경계 지점에 미술관을 세운 이유다. 전쟁과 폭력에 무감각해진 데다 역사 건망증까지 걸려 버린 ‘본토’ 일본인들에게 일본정부의 차별을 고발하고 전쟁 없는 평화의 중요성을 호소하기에 미군기지 철조망 옆은 더 없이 맞춤한 자리였다.
그러나 사키마미술관의 용력은 거기까지일까? 오키나와의 모순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일본 국토 면적의 0.6%에 불과한 이 작은 오키나와에 주일미군 시설의 약 75%가 몰려 있다는 사실이 그 점을 잘 드러내준다. 그나마 넓은 본토로 옮길 수도 있을 테지만 뒤늦게 일본에 편입된 오키나와에 대한 차별은 지금도 여전해 미군기지의 현외(?外) 이전은 이룰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 거기에 헤노코에 또 다른 미군기지를 건설하겠다고 하고,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육상자위대 초동 부대의 거점까지 설치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그 기지가 바로 사키마미술관 옆 후텐마기지를 대체할 기지다.
지난 3월22일 일본정부는 오키나와 지사에게 헤노코 앞 바다 매립 허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후텐마 기지의 헤노코 이전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민들의 반발은 더욱 거세지고 있다. 어쩌면 일본에서 가장 크고 깊은 슬픔을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오키나와…. 오키나와의 눈물은 언제쯤 멈출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