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르네상스 시티 프로젝트’…문화산실 짓는다
개방정책·첨단경영이 피워낸 문화예술의 꽃
얼마 전 싱가포르 무용극단이 에스플러네이드(Esplanade) 극장에서 공연한 ‘매스터피스 인 모션’ 무용극을 관람했다. 3막으로 구성된 공연은 고전발레와 현대무용, 아시아 민속무용을 현대화한 새로운 시도가 어우러진 다문화 콘셉트였다. 싱가포르의 예술공연들은 대부분 이처럼 기획·공연·관객이 다문화적이다. 예컨대 안무는 러시아인, 예술감독은 유럽인, 무용단원은 한국(이 공연의 경우 로사 박 수석무용수) 중국 싱가포르 홍콩 일본 필리핀 호주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등에서 활동했던 이들이 맡는 식이다. 코스모폴리탄 관문인 싱가포르 다민족 화합의 전형을 보여준다.
예술 선진국으로부터 끊임없이 배우고 수용하는 정책이 바로 싱가포르 문화예술의 원동력이다. 이민으로 형성된 나라여서 자연스럽게 갖춰진 국제적 환경 속에 자체 인력으로 발전하기 힘든 분야에 과감한 개방정책을 도입했다. 국제기준의 기획행정력과 글로벌 마케팅 능력이 뒤처지는 한국이 눈여겨봐야 할 대목이다. 싱가포르는 중국계 77%, 말레이계 14%, 인도계 8%로 구성된 다민족사회다. 게다가 각종 형태의 비자를 가진 해외인력이 전체 노동인구의 25%를 차지하기 때문에 각 민족공동체의 협력을 이끌어 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다국적기업에게 문화예술에 적극 지원할 수 있도록 면세혜택을 부여해 문화예술을 지원한다.
싱가포르 문화예술계에선 ‘아트 인더스트리(art industry)’란 말이 자주 쓰인다. 그만큼 예술의 비즈니스 측면을 강조한다. 산업으로서 문화예술 개념 도입은 1999년에 시작된 ‘르네상스 시티 프로젝트’에서 기인한다. 고부가가치 문화예술 분야를 국가 산업동력으로 키우려는 싱가포르 정부의 장기계획이 단계별로 추진됐다.
첫 단계로 2002년 복합문화공간 에스플러네이드가 문을 열었다. 에스플러네이드 콘서트홀과 극장에 설치된 공명장치인 특수 캐노피(Canopy)는 고유의 음을 최적의 상태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연주자를 위한 휴식공간 또한 출연진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래서 에스플러네이드 콘서트홀은 전 세계 음악인이 갈망하는 무대가 됐다.
언론은 세계 최고 연주자들을 만날 수 있는 이 무대를 ‘아시아의 카네기홀’이라 부른다. 값비싼 공연임에도 불구하고 빈 좌석이 많지 않은 까닭은 각종 할인으로 공연예술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정책 덕분이다. 에스플러네이드 운영사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문화공간을 지향해 현재 70%의 관객이 무료로 입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냥 ‘아트’가 아니라 ‘아트 인더스트리’
에스플러네이드는 미래 예술인을 키워내는 예술교육의 산실이자 문화산업의 현장이다. 강변 야외무대와 본관 로비 원형무대는 젊은 문화인들이 무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실험무대다. 실제로 각종 민속악기 연주 등 다양한 공연이 끊이지 않는다. 예술도서관의 경우 각종 문화자료들이 접근하기 쉬운 개가식으로 정리돼 있다.? 에스플러네이드는 싱가포르의 상징이자 시민들의 자부심의 대상이 됐다.
르네상스 시티 프로젝트는 현재 리노베이션 중인 무용전용공연장 ‘빅토리아 홀’과 문학·연극·영화·세미나 등 예술행사공간 ‘더 아트 하우스’, 옛 대법원 청사를 개조하는 현대미술 복합전시장 등으로 구성돼 있다. 이들 시설이 완공되면 싱가포르는 문화예술의 균형 있는 인프라를 갖춘, 명실공히 세계인이 즐기는 문화도시로 거듭날 것이다.
싱가포르의 새로운 아이콘으로 떠오른 마리나베이 샌즈(쌍용건설 시공)도 방문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카지노, 호텔, 쇼핑센터, 뮤지컬 전용극장, 국제전시장, 아트 사이언스 박물관에 정원과 식물원까지 한 콤플렉스 안에 조성돼 문화와 휴식, 엔터테인먼트가 공존한다. 뉴욕에 가지 않고도 언제나 브로드웨이 쇼를 볼 수 있는 곳이어서 동남아 뮤지컬 팬들이 비행기를 타고 와 공연을 즐기곤 한다. 최근 공연된은 연일 매진을 기록했다.
‘싱가포르 비엔날레’는 싱가포르정부 산하기관 문화예술위원회가 후원하는 미술행사다. 어포더블 아트 페어 등 전 세계 화랑들이 대거 참여하는 국제적인 현대미술 전시회이자 축제다. 그동안 홍콩이 누렸던 현대미술 시장이 점차 싱가포르로 옮겨오고 있다고 문화예술 관계자들은 분석한다. 미술품 애호가와 수집가들은 전망 좋은 작품을 선점하기 위해 앞다퉈 지갑을 연다. 미술품은 기본단위가 크기 때문에 그만큼 경제 파급효과가 폭발적이다.
문화도시 명성은 결코 새로 지은 멋진 건물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양질의 콘텐츠를 유도하는 정책과 다양한 편의시설, 서비스가 수반되어야 한다. 국제어인 영어로 쉽게 통할 수 있고, 외국인을 배려하는 상식과 예의를 갖춘 시민의식이 ‘아트 인더스트리’에 대해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이 바로 싱가포르가 다른 나라에 비해 앞선 경쟁우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