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시카우룽 문화중심 프로젝트’…”예술로 도시에 영혼을 불어넣다”
2015년 아시아에서 사상 유례없는 ‘문화전쟁’이 시작된다. 홍콩과 싱가포르, 그리고 광주가 ‘아시아의 문화허브’를 놓고 도시의 운명을 건 선의의 경쟁을 펼친다. 이름하여 ‘홍-싱-광 문화전쟁’이다. 막대한 비용과 에너지가 소요되는 프로젝트인 만큼 성패 여부에 따라 어느 도시에게는 장밋빛 미래가 보장되고, 어느 도시에게는 엄청난 후유증이 뒤따를 수 있다. 한 도시의 운명을 바꿀 ‘세기의 문화대전’을 지금 전 세계가 숨죽이며 지켜보고 있다.
2015년은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이 개관하고 홍콩 문화중심 프로젝트가 본격화되는 시점이다. 기자가 처음 홍콩을 방문한 건 1997년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홍콩은 ‘백만불 야경’ ‘이층버스’ ‘명품시계’ 등으로 알려진 쇼핑 천국이었다. 그런데 올 1월 말, 16년 만에 다시 찾은 홍콩은 어딘지 모르게 낯설게 느껴졌다. 성냥갑을 쌓아놓은 듯한 초고밀도 아파트와 현대식 빌딩이 빚어낸 스카이 라인은 여전했지만 ‘기억 속의 홍콩’과는 사뭇 다른 이미지였다. 뭔지 모르게 상당히 번잡스럽고 부산한 느낌이랄까.
처음엔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홍콩 설 축제(2월4~23일)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중화권 최대 명절답게 침사추이, 빅토리아 하버, 완차이 등 번화가에는 형형색색의 꽃장식과 조명이 내걸려 축제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하지만 이곳 저곳을 취재하면서 이 역동적인 기운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는 확신을 받았다.
진앙지는 홍콩의 심장부에 위치한 시카우룽 문화지구(West Kowloon Cultural District·WKCD). 그 ‘실체 없는’ 에너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예술’이었다. 카우룽(九龍)반도 서쪽 바닷가에 인접한 삼각형 모양의 WKCD는 중국 광저우(廣州)를 고속철도로 1시간에 연결하는 중국의 관문이다. WKCD는 홍콩이 ‘아시아의 문화허브’라는 장밋빛 청사진을 내걸고 십 수 년째 공을 들이고 있는 초대형 국책사업이다. 홍콩의 야심을 말해주듯 부지 40ha, 공사비만 3조원(216억 홍콩달러)에 이른다. 규모로 치면 현재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문화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화려하고 웅장하다.
홍콩의 명품 빅토리아 항구를 바라보고 있는 이 복합문화예술단지에 2015년부터 2031년까지 3단계에 걸쳐 세계 수준의 17개 문화인프라와 부대시설이 속속 들어선다. 먼저 2015년에 M+미술관(5만3500㎡), 다목적 대공연장(1만5000석), 시취 중국오페라극장(1400석), 뮤지컬 전용관(800석), 클래식 전용 콘서트홀(2000석), 현대무용 전용홀(2200석), 4개의 블랙박스 극장(신진작가 실험극 전용) 등 17개 문화인프라(1단계)가 들어선다. 여기에 2016년부터 2031년까지 업그레이드된 공연장(2단계)과 시각예술박물관, 오피스, 아파트단지, 쇼핑몰, 주차장, 부대시설 등(3단계)이 건립되면 30여 년에 걸친 WKCD 대장정의 마침표를 찍게 된다.
WKCD가 처음 잉태된 건 1998년. 당시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하루 아침에 부모가 바뀐 아이처럼 정체성 혼란을 겪었다. 중국의 서쪽 관문으로서 홍콩은 상하이에 밀려 자칫 ‘내일’을 기약하기 힘든 처지였다. 특히 일부 문화단체들은 ‘쇼핑의 도시’라는 편협된 이미지가 홍콩을 망치고 있다며 대대적인 쇄신을 요구했다. 자연스럽게 예술로 도시에 영혼을 불어넣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했다.
세계 최강 스타 예술감독군단
당시 정권을 잡은 텅치화(董建華)정부는 척박한 도시에 문화를 꽃피우는 대대적인 아이디어 공모에 들어갔다. 2년 여 장고 끝에 얻은 회심의 카드가 바로 WKCD였다. 그렇다고 WKCD가 처음부터 힘을 발휘한 것은 아니다. 랜드마크 논란과 옛 전남도청 별관 철거문제 등으로 진척을 보이지 못했던 광주 아시아문화전당처럼 정권교체와 재정문제 등이 맞물려 7~8년 동안 책상서랍 속에 갇혀 있어야 했다. 대다수 홍콩시민들이 WKCD에 대해 시큰둥한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2006년을 기점으로 WKCD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홍콩정부는 WKCD의 핵심시설을 관리·운영하는 재정자문단(FMAG)과 컨트롤타워인 WKCD위원회를 잇따라 설립했다. 2011년에는 ‘도시 속 공원(City Park)’을 테마로 내건 영국의 포스터 앤 파트너스(Forster & Partners)를 WKCD의 주설계사로 최종 선정해 기대감을 높였다.
세계적인 건축가 노만 포스터(Norman Foster)가 이끄는 설계팀은 WKCD를 홍콩의 녹색광장으로 조성하는 친환경 콘셉트를 세웠다. WKCD 인근 19ha에 수목 5000그루와 각종 꽃들을 심는다는 것이다. 특히 WKCD 위원회 수장으로 마이클 린치(Michael Lynch) 전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대표를, M+미술관 총디렉터로 라스 니티브(Lars Nittive)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초대관장을, 세계적인 프로듀서 루이스 유(Louis Yu)를 공연예술감독으로 잇따라 영입해 화제를 뿌렸다. 세계 최강의 스타군단을 거느린 WKCD의 가공할 파워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는 말이 바로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니티브 관장은 “서구의 미술관을 그대로 답습하고 싶지 않다. 글로벌 비전과 아시아의 지역적 특성이 조화된 미술관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며 “건물완공 이전에도 게릴라 아트 프로젝트 등과 같은 행사를 펼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전 세계 예술인들이 WKCD에 주목하는 이유는 비단 ‘스케일’ 때문만이 아니다. 국제도시로서 문화위상을 높이기 위한 홍콩의 도약은 공공부문의 투자와 더불어 문화현장의 자유롭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뒷받침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서양의 관문도시답게 아시아와 서구를 잇는 네트워크 활동이 전개되고, 실험적인 전시공간과 120개 갤러리가 어우러지면서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 중에서도 홍콩 최대 국제아트페어인 ‘아트 HK’는 뉴욕, 런던에 이어 세번째로 큰 경매시장으로 떠올랐다. 특히 세계 최대 아트페어 ‘아트바젤’을 운영하는 스위스의 MCH그룹이 홍콩의 경쟁력을 눈여겨 본 뒤 ‘아트HK’의 지분 60%를 인수하면서 창설 4년만에 블록버스터급 행사로 부상했다.
WKCD는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초대형 프로젝트인 만큼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안정적 재원 확보에서부터 전체 부지를 거대한 도심정원으로 조성하는 설계의 현실성, 과시적인 하드웨어에 맞먹는 콘텐츠 개발 등이 그것이다. 그럼에도 WKCD는 다른 경쟁도시들에게 여전히 경외 대상이다. 쇼핑과 엔터테인먼트, 예술까지 품은 홍콩의 강점은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이 ‘환상조합’이 제대로 힘을 쓴다면 그 시너지 효과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