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중국 ‘조중접경’ 1600km를 가다
강물 얼면 두만강 넘는 소, 사람은 못 건너
“안녕하세요!” 압록강 이편에서 일행 중 누군가 소리쳤다. 50m쯤 떨어져 있었을까. 손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 한 아낙네가 아기를 등에 업고 돌 위에 놓인 빨랫감에 방망이를 두드린다. 빨랫감을 강물에 담가 흔들더니 이내 뺀다. 다시 한번 외쳤다. “안녕하세요!” 힘껏 팔을 들어 손을 흔들어댄다. 이쪽을 보는 듯하던 그 아낙이 잠시 손을 흔들어준다. 일행이 다시 외쳤다. “반갑습니다!”
철조망도 없는 이곳. 한강과는 비할 바 없는 좁은 강 하나만이 놓여 있다. 저편은 북한, 이편은 중국 땅이다. 바라볼 수는 있으나 발걸음을 옮길 수는 없다. 종종 저편에서 누군가 이리로 넘어오곤 한다. 북한과 중국의 경계, 압록강이다.
한반도를 호랑이로 그렸을 때 앞발에 해당하는 한반도 최북단 국경 두만강에서 백두산 천지를 거쳐 압록강까지 1600km 조중접경지대를 종주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 조중접경답사 일행을 태운 버스는 꼬박 일주일간 ‘강변도로’를 내달렸다.
조선족 “조-중 축구경기? 북한 응원해”
인천공항을 떠나 연길공항을 통해 중국 지린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延吉, 옌지)시에 도착했다. ‘북간도’로 불리던 대한민국 면적 절반 크기의 연변에서 정치·사회·문화의 중심지인 연길은 북한과의 국경도시다. ‘부르하통하’(만주어로 ‘푸른 수양버들’이라는 뜻)라는 강이 서울의 한강처럼 남북을 가른다. 도시는 절반이 한글로 덮여 있다. 한민족 동포, 즉 조선족이 절반이 넘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간판 속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한글도 위치가 바뀌어 중국어 아래로 내려가게 된다. 조선족이 사용하는 한글은 한국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한국의 ‘보신탕’은 북한에서 ‘단고기’, 옌지에선 ‘개장’ 또는 ‘개탕’으로 불린다. 수육보다는 주로 전골로 먹는다.
지역적으로 북한과 가깝지만 지금은 남한과의 유대감이 커졌다. 1996년까지 연길의 방송 아나운서는 평양말을 썼지만 1997년 서울말을 연길 조선어 표준말씨로 정했다. 1983년 춘천에 불시착한 민항기 납치사건으로 ‘대한민국’의 실상이 알려졌고, 88서울올림픽에 이어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활발해진 한국과의 교류 덕분이다. 때마침 ‘고난의 행군’을 겪은 북한과는 교류가 줄었다.
조선족 가이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한국이 못 살았다면 아직 많은 조선족들이 시골에서 땅을 파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지만 축구경기가 열리면 조선족은 한국이 아닌 중국을 응원한다. 그러나 중국-북한 경기에서는 북한을 응원한단다. 그렇다면 한국과 북한의 경기에선 북한을 응원할까? 이 질문엔 연고지에 따라 다르다고만 했다.
한국인이 설립한 연변과학기술대학은 이 지역의 자랑이다. 졸업 후 초봉 5000만~6000만원을 받는 엘리트를 배출한다. 기숙사에서 강의실까지 걸어서 20분에서 최대 1시간 걸릴 만큼 넓은 캠퍼스를 가진 연변대학은 중국 100위권 대학이다. 방학인데도 학생들이 바쁘게 강의실을 오갔다. 연변대학에서 북한은 중요한 나라다. 북한 내 화교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고, 중국과 북한의 문화융합을 논의하는 ‘두만강포럼’을 통해 학술교류도 한다.
이 대학 정치학부 김향해 교수는 “북한은 중국이 결코 버리지 못하는 이웃”이라며 “북핵 같은 최악의 상황에서도 안고 갔다. 하지만 원조는 국내외 환경과 정치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지속적이지만 일관적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정은 체제로 바뀐 뒤 중국의 영향이 더욱 커지고 있으므로 장기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연어 살던 두만강, 지금은 ‘검은’ 강
한반도 최북단 꼭짓점에 맞닿은 두만강 국경도시 중국 도문(圖們, 투먼)으로 가는 도로변에 ‘탈북자 수용소’가 보인다. 붙잡힌 탈북자가 100명이 되면 북으로 송환된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와 있는 탈북자는 2만5000여명. 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5만명이 탈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개장수’로 불리는 인신매매범들의 표적이 되기도 한다. 중국에서는 4만5000명의 북한 주민들이 일하고 있는데, 북한은 규모를 20만명까지 확대하겠다고 한다. 중국은 몰려드는 북한주민에 대해 망설이고 있다. 한국은 이들을 얼마나 수용할 수 있을까.
중국에서 도문대교를 건너면 함경북도 남양시다. 두만강 양안을 잇는 대교가 절반씩 중국과 북한 소유지만 지금 한국인은 중국쪽 다리조차 접근할 수 없다. 중국 공안의 통제만이 삼엄하다. 동해로 빠지는 두만강 하구에 땅이 없는 중국은 그래서 북한의 나진선봉지구를 해상창구로 삼았다. 그 나진선봉의 길목이 바로 중국 훈춘이다. 훈춘에서 내려와 중국 권하세관 앞 국경선 철조망 사이로 두만강대교 너머 북한 원정리세관이 보인다. 검문에 나선 중국군은 촬영에 민감해 하며 일행의 여권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분위기가 좋지 않다.
도문에서 훈춘을 거쳐 다시 남동쪽으로 더 내달리면 방천이다. 버스 밖 풍경은 온통 옥수수밭. 미국의 식량지배에 대비해 중국정부는 옥수수밭 200평(667m²)당 6만원의 보조금을 줘가며 재배를 권장하고 있다. 식량보다 사료용으로 쓰이는데, 일부는 북한으로 수출된다. 예전엔 밭 사이사이 양귀비를 심기도 했다지만 마약사범에 대한 처벌이 엄격한 요즘은 어떤지 알 수 없다.
조·중·러 3국 접경지점에 국경을 알리는 ‘토자비(土字碑)’가 서 있다. 방천에서는 휴대폰 로밍이 러시아로 뜬다. “닭 울음소리 3국에 들리고 개 짖는 소리 3국을 깨우며 꽃향기가 사방에 풍기고 웃음소리 이웃나라에 전해지는 곳”이란다. 망해각 전망대에 오르니 두만강을 중심으로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북한으로 연결되는 ‘조러대교’, 중국과 러시아 땅을 구분하는 철조망 등이 얽혀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국경지대 풍경이다.
다음 날 다시 연길에서 삼합으로 가 공사 중인 망강각(望江閣) 펜스를 넘어 올라 북한 회령시를 조망했다. 비슷한 색 지붕으로 가지런히 놓인 집들과 지붕 위 굴뚝들, 푸른 논밭, 저 멀리 주체사상탑.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떼 지어 어디론가 향하더니 기념공원 같은 곳에 모여서 한참 서 있다. 왼편으로는 세관. 이곳의 두만강은 가운데 모래톱이 형성돼 있어 폭이 더욱 좁아 보였다. 그래서인지 일제 강점기엔 독립지사들이 이곳을 통해 중국을 오갔고, 탈북자도 많다고 한다. 강물이 어는 겨울엔 소가 두만강을 건너기도 하는데, 사람은 국경 넘은 소를 찾으러 갈 수 없다. 한 눈에 비치는 저 동네에서는 이 망강각에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와 망원경으로 들여다보고 떠나기를 반복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좀더 서쪽으로 내려오면 중국 남평의 산 중턱쯤 되는 도로에서 북한 무산군이 내려다보인다. 안개가 희뿌옇게 휘감은 산 아래 움푹 깎여 나간 면이 무산철광이다. 아시아 최대 노천철광이자 최대 폐수 방류지라는 무산철광은 도문 근처에 있는 제지회사, 펄프회사 등과 함께 두만강의 3대 오염원이기도 하다. 연어도 살았다는 두만강은 지금 검은 색이다.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은 없었다.
압록강변도로, ‘손 내밀면 닿을 듯’
두만강과 압록강이 양 방향으로 발원하는 백두산을 서쪽과 남쪽에서 올라 천지를 보고 다음날 백두산 아래 동네에서 다시 서쪽으로 길을 떠났다. 중국 장백현에서 단동까지 북한과 맞닿은 국경은 압록강이다. 압록강을 따라 도로가 나 있다. 버스 왼쪽 자리에 앉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압록강을 굽이굽이 내려간다. 창 밖으로 북한 땅이 보인다.
중국 장백현과 마주한 북한 혜산시를 도청소재지로 한 양강도(兩江道)는 두만강과 압록강이 모두 흐른다. 명칭으로 내용이 유추되는 북한식 이름이다. 양강도 국경지대에는 김일성의 첫째 부인 이름을 딴 김정숙군(郡) 김정숙읍(邑)에 이어 김일성 아버지인 김형직군 김형직읍이 중국과 마주보고 있다. 마을이며 산 중턱이며 곳곳에 적힌 선전문구가 북한임을 일깨운다. 한 건물에 적힌 ‘장군복, 태양복, 수령복’을 보고는 옷 만드는 공장인 줄 알았는데, 의복(服)이 아닌 복(福)이란 뜻이란다.
압록강(鴨綠江)은 오리털이 깔린 초록색 강이라는 뜻. 파란 하늘, 푸른 산, 강물은 반짝였지만, 오리는 한 마리도 안보인다. 오전 8시. 대신 강가에는 빨래하는 아낙과 물놀이하는 아이들, 웃통을 벗고 몸을 씻는 청년들이 마을마다 나와 있다. 한가로이 둔치를 어슬렁거리는 소와 말, 풀을 씹는 염소들이 드문드문 초원 같은 풍경을 연출했다.
중국 임강에서 7년을 지냈다는 한 탈북자에게 ‘물 건너 온’(‘탈북’의 은어) 이유를 물었더니 “협동농장 조장인데, 일하다가 소가 죽어서 도망왔다”고 하더란다. 북에서 소 1마리는 사람 10명의 목숨과도 같다고 했다.
강변을 따라 이어지는 마을 주변 산은 숲 대신 밭으로 조성된 곳이 많았다. 산중턱을 넘어 거의 정상 부근까지 개간해 밭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먼 풍경으로 한 눈에 보면 마치 비탈져 있는 평야 같다. 강물을 따라 한 떼의 통나무가 떠내려간다. 언뜻 보면 뗏목 같지만 압록강 상류 일대에서 벌목한 나무들을 제대로 엮지 않고 물 흐름에 맡겨 하류로 내려 보내는 것이다. 그래도 통나무 무리의 맨 앞자리에는 한 일꾼이 마치 기수처럼 앉아 함께 떠가고 있다.
마을이 조성된 집들은 한결같이 우리가 바라보는 쪽을 향했다. 남으로 창을 내고 북으로 문을 내서였을까. 집은 반듯하고 간격이 일정하며 같은 방향으로 지어졌다. 지붕도 마을마다 같은 색이다. 공동생활을 위한 마을이 단위별로 반복되는 전형적인 사회주의 주거형태다.
고구려의 옛 수도 국내성이 있던 집안(集安)에서 광개토대왕비를 만났다. 6m가 넘는 장대한 석비는 방탄유리로 만들어진 비각(碑閣) 속에서 중국인들의 관리를 받고 있었다. 200m 떨어진 광개토대왕릉에 오르니 양쪽으로 중국과 북한의 풍경이 들어온다. 13m 높이로 돌을 쌓아 만든 장군총은 장수왕릉임을 확인 받지 못해 아직 장군총(將軍塚)이다.
동이(東夷)라는 이름은 중국의 업신여김이 담겼다지만, 따지고 보면 ‘활을 잘 쏘는’ 고구려 민족에 대한 두려움이 담긴 말이 아닌가. 고구려와 발해까지 큰 활(夷)을 쏘며 말 달리던 기마민족의 특성은 한복 옷고름을 옆으로 매어 말을 탈 때 한쪽으로 날리도록 한 것과 말 등자에서 빠지지 않도록 고무신 앞을 뾰족하게 높인 것에 아직도 남아 있다. 더 뻗어나가야 할 한반도의 역사는 최북단 국경선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한 채.
비가 세차게 몰아쳐 물안개가 가득 피어 오른 압록강을 따라 북한과 중국이 공동관리하는 수풍댐으로 향했다. 1944년 세워진 이 수력발전소는 평양으로도 전력을 공급한다. 유람선을 타고 강 위에서 좀 더 가깝게 바라본 북한 삭주군 주민들은 모터보트를 타고 낚시를 나가거나 삼삼오오 그물을 치기도 했다. 인민복을 입은 국경수비대, 우산을 쓰고 강을 바라보는 주민, 강기슭 배위에 올라 놀고 있는 아이, 우의를 입고 강가에서 작업하는 사람들. 그들도 유람선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서로 손을 흔든다. 지금까지 국경지대 가운데 가장 지척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풍경’보다 ‘사람’을 찾아 내내 눈 밝혔던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사람’을 발견하면 멀리서인들 유난히 반가웠다. 심지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 언젠가 그들에게 국경을 오가는 자유가 생긴다면 “강 너머에서, 유람선에서, 그렇게도 손 흔들던 그 사람들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하는 걸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