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건국 65주년] ⑤ ‘성지’ 말고도 갈 곳 많다

이스라엘, 유네스코?세계유산 유적지 7곳??????

“이스라엘은 정체돼 있기도 하고 생동감이 넘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는 지루한 곳이기도 하고 또 다른 면으론 절대 삶이 지루해질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 양면성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전쟁의 참혹함을 엿보고 평화와 자유의 소중함을 깨닫고 싶은가? 자연의 광대함과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은가? 이스라엘로 가라.”(김종철 이스라엘 전문 다큐멘터리 감독)

이스라엘은 오랜 종교적 갈등, 전쟁, 테러 등 부정적인 수식어와 성지 순례지라는 고정관념에 가려져 있다. 그러나 성지 외에도 볼거리가 많은 곳이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에는 세계적으로 기념할 만한 많은 인류의 업적들이 있다. 유네스코는 아코, 마사다, 텔아비브 화이트시티?등 이스라엘의 문화유적지 7곳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텔아비브 화이티 시티 거리에 있는 바우하우스 양식 건물. 텔아비브 공항에서 가깝다.?

모던 건축물 총합, 텔아비브 화이트 시티??

텔아비브 화이트시티는 20세기 초 건축 및 도시 계획에서 모더니즘 운동의 다양한 경향이 종합적으로 나타나는 중요한 장소다. 이곳의 모더니즘 건축은 지역의 문화와 기후에 알맞게 적용돼 지역 특유의 전통과 잘 융합됐다.

텔아비브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기간인 1909년에 건설돼 대도시로 발전했다. ‘화이트시티’는 1930년 초부터 1950년대까지 패트릭 게디스(Sir Patrick Geddes)의 도시계획을 기반으로 현대적이고 기능적인 도시로 건설됐다.

텔아비브는 고대 야파에서 시작해 네베 제데크(Neve Zedek)의 역사 지구(1896), 아쿠자트 바이트(Achuzat Bayit, 1909), 레드시티(the Red City), 레브 하이르(Lev Hayir, 지금 텔아비브의 중심부) 그리고 텔아비브 화이트시티(1931~1947)의 연속적인 도시 계획에 따라 개발됐다.

건물들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에리히 멘델존(Erich Mendelsohn), 그리고 바우하우스(Bauhaus) 건축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모더니즘 사상을 지역적 조건에 적용한 것이 특징이다. 유럽 양식 건물의 넓은 유리창은 무더운 날씨에 적합하게 상대적으로 길고 좁은 형태의 창문으로 변경됐다. 많은 건물에는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것과 같은 필로티(piloti, 건물을 지면보다 높이 받치는 기둥)를 설치해 바닷바람이 통할 수 있게 했다.

하이파 도시에 명소 바하이 성지. 텔아비브에서 자동차로 1시간30분 거리에 있다.

하이파 이슬람 소수종파 바하이교 성지???

하이파(Haifa)와 갈릴리(Galilee) 서부 지역의 바하이교 성지(Baha’i Holy Place)는 심오한 종교적 의미와 바하이교의 강력한 성지순례 전통을 보여주는 곳이다. 이 유산은 바하이교 창시자들과 관련된 최고의 성지 두 곳을 포함하는데, 아코(Acre)의 바하울라(Baha’u’llah) 사원과 하이파의 바브(Bab) 사원, 그리고 주변의 정원과 관련 건물 및 기념물이다. 이 두 사원은 하이파와 갈릴리 서부 7개 지역에 산재한 바하이교 순례지의 건물·기념물·유적의 일부다.

바하이교의 기원은 1844년 이란 쉬라즈(Shiraz) 지역의 선지자이자 예언자인 바브(Bab)에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새로운 교리는 급속히 전파됐으나 심하게 박해를 받다가 1850년에 처형됐다. 이 종교의 중심지는 1868년 이스라엘의 서부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했다. 예언자이자 종교의 창시자인 바하울라(Baha’u’llah)가 1853년에 이란에서 추방당한 뒤 15년 동안 이라크·터키·이집트를 떠돌다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압둘아지즈에 의해?아코로 유배된 시기다.

바하울라는 아코에서 24년 동안 머무르며 바하이교의 근간인 경전을 편찬하고, 종교의 정신적·행정적 중심지를 설립했다. 바하울라는 그곳에 있던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으며, 집터에 그의 묘가 세워졌다. 압둘라 파사의 집은 압둘바하(Abdu’l-Baha, 바하울라의 장남이자 바하이교의 후계자)가 1911년까지 거주한 곳으로, 그의 아들 쇼기에펜디(Shoghi Effendi)가 태어난 곳이며 바브의 유해가 하이파의 거대한 무덤으로 이장될 때까지 안치됐던 장소다. 바브의 유해는 1909년 이란에서 하이파의 거대한 무덤으로 이장됐다.

이 무덤은 처음에는 단순한 형태였으나 1953년 확장되면서 금으로 만든 돔으로 장식됐다. 현재 건물은 1990년~2001년 조성한 1㎞ 길이의 정원을 통해 출입할 수 있다. 바하울라가 설립한 종교, 행정 중심지는 오늘날까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으며, 바하이교는 서유럽을 거쳐 북아메리카와 세계 전 지역으로 전파됐다. 바하이교에 소속된 종교 단체는 전 세계적으로 500만개에 이른다. 바하이교는 세계 주요 종교의 창시자인 아브라함·모세·예수·부처·마호메트·크리슈나에 대해 신이 인류를 계도하려고 보낸 사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아코의 대상(隊商)들을 위한 숙소(Khan El Umdan). 아코는 하이파에서 자동차를 타고 해변도로를 따라 1시간 30분이면 도착한다.?

고대 도시 아코, 십자군 요새 그대로 간직????

아코(Acre)는 페니키아 시대부터 계속 사람이 살아온, 역사적인 성곽 항구 도시이다. 18~19세기 오스만 제국 때 세운 요새 도시로 성채, 모스크, 대상(隊商)들을 위한 숙소(Khan El Umdan), 목욕탕 등 전형적으로 도시의 요소를 갖춘 점이 특징이다. 1104~1291년 십자군이 점령했던 마을의 터는 거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으며, 중세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 왕국의 수도 배치와 구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다.

아코는 대표적인 역사 도시로, 현존하는 18~19세기의 이슬람 요새 마을 아래에 중세 십자군 때 건물의 중요한 유적이 보존돼 있다. 그 결과 예루살렘의 중세 십자군 왕국 수도의 배치와 구조의 대표적인 예가 됐다. 현재 아코는 성벽을 두른 오스만 제국 도시의 중요한 예다. 성채, 모스크, 대상의 숙소, 목욕탕 등 전형적인 도시적 요소를 갖췄고 부분적으로 지하의 십자군 구조물 위에 세워졌는데, 상당히 잘 보존돼 있다.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독립한 뒤 옛 도시에는 소수의 이슬람교도만이 거주했다. 전투가 뜸해지면서 다른 지역에서 온 많은 팔레스타인 아랍 난민이 옛 도시에 도착해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많은 유대인은 신도시에 정착했다. 성벽 안에 사는 주민 5000명은 주로 아랍인이며, 약 80%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서 온 이주자들이다.

유대인들이 군 입대전 꼭 방문하는 마사다. 통곡의 벽과 함께 제2의 성지로 불린다. 예루살렘에서 동남쪽 사해 인근에 있다.

인간 저항·유대인 정체성 상징, ‘마사다’???

마사다(Masada)는 황야를 배경으로 사해(死海, Dead Sea)를 굽어보는 바위투성이 구릉에 자리한 천혜의 요새다. 장엄하고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이 유적은 고대 이스라엘 왕국의 상징이었다. 73년 로마군의 공격에 맞선 유대 저항군은 이곳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이다 최후를 맞았다.

유대의 헤롯 왕(Herod, 기원전 37년~기원후 4년 재위) 때 초기 로마 제국의 고전주의 양식으로 건설한 왕궁 터가 남아 있다. 왕궁을 둘러싼 병영과 요새, 공격 램프(ramp, 건축물로 진입하기 위해 만든 경사로)는 로마 제국의 공성 보루 가운데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가장 완전한 유적이다.

마사다는 고대 유대 왕국의 상징으로 1세기 후반에 심각하게 파괴됐다. 이후 이스라엘 사람들은 디아스포라(Diaspora)의 운명을 걸었다. 마사다에 있는 헤롯 왕의 궁전은 초기 로마 제국의 화려한 별궁의 대표적인 예다. 구릉을 둘러싼 병영과 요새는 가장 세련되고 완전한 로마 제국의 공성 보루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우뚝 솟은 마사다의 구릉은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굽어본다. 서쪽으로는 언덕과 단구가 많은 유대 황야가 펼쳐지고, 동쪽으로는 극도로 험한 지대가 찬란한 사해로 꼬리를 감춘다. 거대하고 가파른 벼랑이 남쪽 지평선(시리아-아프리카 지구대의 서쪽 벽)에 걸쳐 있으며 마사다는 이 벼랑의 일부를 이룬다. 북부 궁전이 주요 구조물인 북쪽 지역은 헤롯 왕 시대의 주요 단계(기원전 1세기 말)에 지금 같은 형태를 이뤘다.

해안 도시 하이파에 자리한 갈멜산 서쪽 사면에서 인류 진화의 유적지가 발견됐다. <사진=바이블워크>

갈멜산, 인류 진화의 유적지

갈멜(Carmel)산맥 서쪽 사면의 유산 지역에 있는 타분(Tabun), 자말(Jamal), 엘 와드(el-Wad), 스컬(Skhul) 동굴 유적이다. 54ha의 면적에 50만 년에 걸쳐 이뤄진 매장 유적과 고대의 석조 건축물,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과 축산으로 변천된 인류 진화의 흔적을 담고 있는 문화적 축적물이 있다.

네안데르탈인과 해부학적으로 초기 현생 인류가 중기 구석기 시대인 무스티에 문화(Mousterian, 유럽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분포한 구석기 시대 중기의 대표적 문화)의 틀 안에서 공존했음을 입증하는 유적이다. 그런 이유로 이 유적은 일반적으로는 인류 진화, 특별하게는 레반트(Levant)의 선사시대의 연대 층위학의 기초에 대한 중요한 유적이다. 90년간의 고고학 연구로 비할 데 없이 긴 연속적인 문화를 밝혀냈으며, 서남아시아의 고대 인류의 생활상을 보여 주었다.

갈멜산의 4개의 동굴인 타분·자말·엘 와드·스컬 동굴과 계단식 비탈은 나할 메아롯(Nahal Me’arot) 계곡과 와디 엘 무그하라(el-Mughara) 계곡의 남쪽을 따라 서로 인접해 모여 있다. 갈멜 산맥 서쪽의 해안 평원으로 열려 있는 비탈면의 계곡은 선사시대 주거지를 한 눈에 보여 준다. 가장 잘 보존된 지중해의 산호초 화석 지역 중의 한 곳에 있으며, 전기 구석기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50만 년에 걸친 인류의 진화를 보여 주는 문화적 축적물을 간직하고 있다.

인류 발전의 중요한 시기에 관해 거의 완벽한 연대체계를 보여 주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고고학적 증거에는, 현생 인류의 출현, 계획에 의한 매장, 석조 건축물의 초기 징후들, 수렵·채집 생활에서 농경생활로의 변천이 나타나 있다.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띠고 있는 요소들로는 4개의 동굴과 비탈면, 채 발굴되지 않은 축적물, 이미 발굴된 인공물, 유골 등이 포함된다.

나할 메아롯 동굴과 와디 엘 무그하라 경관은 선사시대의 동굴 환경을 보여 주며, 엘 와디 비탈면의 발굴로 나투프(Natufian) 마을의 흔적인 유물·석조 가옥 유적·구덩이 유적 등을 볼 수 있다.

네게브 사막 맘싯 국립공원의 단파텔. 이스라엘 중앙 남단에 위치. ?

향료 교역로, 네게브 지역 사막 도시??

할루자(Haluza)·맘시트(Mamshit)·아브다트(Avdat)·쉬브타(Shivta)는 나바테아인(Nabatean)이 거주하던 네게브(Negev)의 사막 도시로, 마을과 성채, 농업 경관 등과 함께 지중해 연안까지 연결된 향신료 교역로를 따라 펼쳐져 있다. 나바테아인은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아라비아 남부에서 지중해 연안으로 유향(乳香)·몰약(沒藥)을 교역해 큰 이득을 얻고 번영을 누렸다. 정교한 관개 시설과 도시 건축물, 성채, 대상들의 숙소 흔적은 거친 사막 환경에서 교역·농사를 지으며 정착한 인간 생활이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네게브 사막의 나바테아 도시들과 교역로는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유향이 지닌 경제·사회·문화적 중요성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이 교역로는 유향과 기타 무역품뿐만 아니라 사람과 사상이 이동하는 수단도 제공하였다. 네게브 사막의 향료 교역로를 따라 뻗어 있는 도시·성채·대상들의 숙소·정교한 농업 체계는 거친 사막 환경에서 나바테아인이 어떻게 5세기 동안 번영을 누렸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경이로운 증거다.

기원전 3세기부터 500년 넘게 번성한 나바테아의 향신료 무역의 역사를 간직한 마을·성채·대상들의 숙소, 화석화된 농업 경관은 동쪽으로 요르단의 국경 모아에서 북서쪽의 할루자에 이르기까지 네게브 사막을 100㎞ 가로질러 펼쳐 있다. 이들 유적은 지금의 오만과 예멘, 소말리아에 해당하는 지역의 가시나무에서 추출한 유향과 몰약을 수송하는 교역로의 일부였다.

기원전 3세기부터 서기 2세기까지 나바테아인은 유향과 몰약을 사막을 가로질러 지중해 연안까지 운송했다. 그 거리는 자그마치 1800㎞에 이르렀다. 교역은 그리스 로마 세계의 사치품 수요가 늘어나면서 더욱 활발해졌다. 이러한 교역은 사막에 거주하는 나바테아인이 그 지역에 관한 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통행할 수 없는’ 사막 지역에서 로마인을 비롯한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아라비아 반도 남쪽까지 이동해 서로 맺어 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

브엘세바 지역 모습. 맘싯 국립공원에서 동북쪽 방향에 있다.

성서 텔, 믓기도, 하조르, 브엘셰바

믓기도(Megiddo)·하조르(Hazor)·브엘셰바(Beer Sheba) 이 세 곳의 텔은 밀집한 도시 공동체에 꼭 필요한 지하 집수(集水) 시설을 갖추었는데, 이는 레반트(Levant, 동부 지중해상의 섬과 연안 제국) 지역의 철기 시대 유적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으로 꼽힌다.

‘텔(Tel, 선사시대 정착지 토루)’은 동부 지중해 지역, 특히 레바논과 시리아, 이스라엘, 동부 터키에 분포한 편평한 지대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난다.

이들 텔은 이스라엘 영토를 가로질러 퍼져 있는데, 북부의 텔 하조르는 갈릴리 호수 근처에, 텔믓기도는 키숀 강(Qishon River) 최북단 바로 북쪽에 있으며, 텔브엘셰바는 이스라엘 남부의 네게브 사막(Negev Desert) 근처에 있다.

선사 시대 정착지인 세 곳의 텔은 고대 근동 지방에서 이루어진 광범위한 교역로와 국가 간의 동맹을 통해 단련된 인간 가치의 상호 교환을 대변한다. 그리고 이집트와 시리아, 에게 해(Aegean) 지역의 영향력을 융합해 이 지역 고유의 양식으로 형성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사진=이스라엘 관광청 제공, 글=유네스코 세계유산 자료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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