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첫 시리아 유학생 압둘 와합, “시리아의 평화를 기원해주세요”
시리아 왕족 출신··· 변호사 활동하다 친구따라 한국 유학
“한국의 유일한 시리아 유학생 압둘 와합(Abdul Wahab Al Mohammad Agha)입니다. 현재 동국대 대학원에서 한국법과 시리아법 비교, 국제상법을 공부하고 있어요. 29살이고, 한국에 온지는 3년 정도 됐고요.
8남매 중 장남이에요. 할아버지가 시리아 왕자셨죠. 왕족이라고 할 수 있지만 1946년 공화정이 시작된 후 그런 개념이 모두 사라져 지금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어요. 한국도 그렇지만 시리아도 장남에 대한 기대가 커요. 저도 늘 아버지를 따라?친척의 대소사 등에 참여하며?장남으로 해야 할 일을 배웠어요. 시리아에서는 아직 친척간 결혼이 이뤄지고 있어요. 저의 집안도 물론이고 장남은 특히 그 관습에 따라야 해요.
갑자기 한국으로 간다는 말에 모두들 놀란 건 당연한 일이죠. 시리아 최고 학부인 다마스쿠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변호사로 활동하던 장남이 생소한 나라에 간다니 믿을 수가 없었던 거예요. 자유롭고 싶었고,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에 처음에는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가려고 했어요. 다마스쿠스대와의 관계 등으로 소르본대에서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를 받고 석박사 학위를 할 수 있었죠.
그때 한창 한국 친구들의 매력에 빠져 지낼 때였어요. 따뜻했어요. 시리아에서 길을 잃어버린 한국 유학생을 우연히 만나 도와주면서 한국사람들과 인연을 맺게 됐어요. 이 친구를 통해 다른 한국 유학생을 알게 되고 그렇게 한국을 알게 됐죠.
어머니는 혹시 한국 여학생을 못 잊어 가는 거 아니냐 그러셨는데, 그건 아니였고요. 한국이란 사회가 궁금했어요. 친구 따라 강남간 거죠. 학교에서도 이해를 못했어요. 한국을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프랑스 소르본대도 그렇게 좋은 조건으로 가기가 쉽지 않았거든요. 다들 미쳤다고 생각했죠. 여기 오는데, 추천서를 받아야 하는데, 교수님들이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몇 달 고생했어요.
어렵게 온 한국, 당연히 6개월 동안 음식, 기후 때문에 좀 고생도 했죠. 한동안 음식을 못먹어 살이 10kg 빠지기도 했어요. 홍익대 어학당의 한 선생님이 살려면 먹어야 하지 않겠냐 걱정을 많이 하셨을 정도로요. 정말 살기 위해 먹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익숙해졌고요. 지금은 다 좋아요. 정 많은 친구들의 도움도 크고요.
시리아와 한국이 수교가 없어 장학금을 받는데 제약이 많아요. 동국대에서 그나마 편의를 봐줘 50%를 도와주고 있죠. 아랍어 과외, 통역 등을 하며 생활비는 벌고 있어요. 병원 통역 등을?하면 많이 벌 수도 있겠지만 공부하러 온 건데 돈 버는데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죠.?필요한 만큼만 벌어요.”
시리아 내전 후 300여 명의 시리아인 한국으로 와?
“요즘 걱정이 많아요. 10여 일 이상 가족과 통화가 안 되고 있어요. 고향이 시리아의 시골마을 알라카(Al Rakka)인데, 정부군의 공격을 자주 받는 곳이에요. 내전 기간에 7명의 친척과 15명의 친구를 잃어 불안한 마음이 커요.
시리아를 두고? 러시아와 미국이 장사를 하고 있어요. 미국이 표면적으로 아사드 정권을 비판하지만 물밑으로는 러시아처럼 아사드 정권이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죠. 과격한 이슬람세력이 정권을 차지할 경우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죠. 최근 시리아와 이스라엘 국경사이에 장벽을 세우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아요.
이스라엘이 지난 30년간 가만히 있다가 왜 갑자기 장벽을 치고 군사경계를 강화했을까요? 아사드 정권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죠. 이스라엘과 국경을 접한 아랍국가 가운데 이스라엘을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시리아 밖에 없거든요.
하지만 아사드가 물러난다고 해도 이스라엘, 미국이 우려하는 일은 발생하지는 않을 거라 믿어요. 시리아 국민들은 평화로워요. 이번 시위도 민주화를 요구했던 것이에요. 8개월간 비폭력으로 맞섰던 시민들에게 정부가 무기를 사용하자 참지 못해 지금의 상황으로 오게 된 것 뿐이죠. 시리아는 오랜 옛날부터 기독교인과 무슬림이 평화롭게 살던 나라에요. 못 사는 나라도 아니고요. 과일도 풍부하고 사용할 만큼의 석유도 나와요.
내전으로 300여 명의 시리아인이 한국으로 왔어요. 3년 전 한국에 왔을 때는 시리아 사람을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지금은 좀 있어요. 자동차 무역업 등을 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대부분이에요. 현재 이들은 난민신청을 해놓은 상태지만 몇 명이나 난민지위를 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한국말도 할 줄 알고 여기서 얼마간 생활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도와줄 일이 많더라고요. 한국 정부에서는 시리아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비자가 만료된 이후에도 한국에 머물러도 좋다고 했습니다. 고마운 일이죠. 지난 8월에는 시리아 내전의 평화로운 종식을 기원하는 행사를 함께 하기도 했죠.
‘시리아의 날’과 같은 행사를 열고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시리아에 대한 소식을 나누고 싶어요. 운영하는 사이트(시리아코리아)가 있어요. 이 글을 읽으시는 분은 꼭 한 번 방문해주세요.
시리아에 많은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합니다. 함께 고민하며 이 싸움을 어떻게 끝낼지 도와주세요. 한국과 시리아는 같습니다. 한국의 아이들이 희생당하면 슬프듯이 시리아의 어머니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머니가 늘 하시는 말씀이 있어요. 너에겐 조국이라는 엄마가 한 명 더 있음을 늘 명심해라. 이 말씀을 들을 때면 눈물이 나요. 힘들고 외롭지만 시리아를 위해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시리아가 평화를 되찾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