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책임’이라 쓰고 ‘기업책임’이라 읽는다
국가 지배구조 개선해야 기업도 정부도 ‘사회책임’ 다 할 수 있어
‘사회책임’이라는 화두로 뭉친 9개 단체가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꺼내 놓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대통령 후보들의 의견을 물었다. 15일 오후 여의도 국제금융센터(IFC) 8층의 딜로이트 안진회계법인 대회의실에서 열린 ‘경제민주화 시대, 차기 정부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과제’이란 제하의 세미나에서였다. 기자는 이날 이 자리에 토론자로 참여해 10분 남짓 개인 의견을 밝혔다.
주최 측인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등 9개 단체는 이날 행사를 앞두고 ISO26000이라는 지구촌 사회책임 가이드라인을 기초로 설문을 만들어 대선 후보들에게 답변을 요구했다. 국가나 비정부기구(NGO)도 ISO26000의 적용 대상이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국가권력의 ‘사회책임’이어야 할 주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으로, ‘경제민주화’의 화두가 CSR로 각각 좁혀졌다.
이러다보니 ISO26000의 7가지 주제 중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조직 지배구조(Governance)’에 대한 상상력이 빈약했다. “(가칭)사회책임부 아니면 장관급 사회책임위원회를 신설할 용의가 있냐”고 대선후보들에게 물은 것을 보면 빈약해도 ‘너~무’ 빈약했다. 딱한 노릇이다. 대선후보들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무조건 “하겠다” “적극 검토 하겠다” 수준 아니겠는가.
국가권력 비웃는 한국기업들
국가권력을 5년간 행사하게 될 정치세력에게 ‘사회책임’세력이 요구할 수 있는 ‘조직 지배구조(Governance)’ 개선 과제는 ‘사회책임부 신설’이 아니다. 2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좋은 정권이 들어서면 CSR 성과가 좋아질 것이라는 전통적인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것. 현실은 다르다. 의지가 충만한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관료사회와 기업들을 긍정적인 변화와 혁신으로 이끌 충분한 시간이 부족하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문제는 기업을 철저히 대상화 한 결과 낮은 CSR 성과의 원인을 순전히 ‘기업’ 탓으로만 돌리고 있는 점이다. 기업의 탈법과 불법, 무책임한 승자독식의 논리들이 과연 관료사회와 정치권 없이 기업 혼자만의 ‘활약’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기자는 최근 한국 대기업들의 활약(?)과 정치권의 무능을 몇 가지 열거했다. 국민들이 19대 국회의 첫 국정감사에서 ▲4대강 건설 담합 의혹(건설회사들)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현대자동차) ▲이동통신 원가공개 등 논란의 중심에 있는 대기업들의 의혹을 해소하리라 기대했지만, 국회는 그런 기대를 저버렸다. 여야가 합의로 최고경영자를 증인으로 모시려던 계획을 대부분 철회한 것을 보면, 어쩌면 국민들이 원하지 않았던 걸까.
사내하청 계열사에 비자금조성을 지시한 혐의로 경찰이 G사를 내사했다는 얘기도 했다. 그런데 해당 계열사가 “우리가 조성한 비자금은 G사와 무관하다”고 해명, 수사가 유야무야 됐다는 얘기였다.
이밖에 이동통신 원가 공개를 둘러싼 방통위의 궁색한 SK텔레콤 감싸기를 정작 당사자인 SK텔레콤 스스로가 “우리도 독자 항소권이 있다”면서 행정법원의 판결(공개하라!)에 항소키로 했다는 철 지난 뉴스도 전했다.
국가 지배구조 고쳐야 ‘사회책임’도 가능
요컨대 이날 세미나에서는 기업이 CSR의 뿌리인 법적 책임조차 다 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에서 그 책임이 마치 기업 스스로에게만 있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한국의 사회책임 세력이 공정거래위원회, 고용노동부, 방송통신위원회, 국세청, 제19대 국회에게 모두 면죄부를 준 것이다. 그것도 아주 당당하게 공식적으로.
ISO26000 국제표준 초안에 따르면, ‘조직 거버넌스’는 “조직이 목표를 추구하기 위해 결정을 하고 실행하는 체계”로 정의된다. 또 “소유자, 회원, 구성원 또는 기타, 이런 결정 권한과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거버넌스의 방향을 정한다”고 했다.
“국가 구성원(대한민국 국민)이 조직의 목표(한반도의 지속가능한 평화와 발전)를 추구하기 위해 결정(선거)하고 실행(정치)하는 체계”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국가라는 조직의 지배구조를 개선하는 문제다. 정부조직법 몇 개를 뜯어 고치는 수준이 아니다. 헌법을 고쳐야 하는 일이다.
지난 11월2일자 <4년 중임제 개헌 대선 이슈로 뜬다>는 중앙일보의 기사는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오보가 될 전망이다. 여당 후보와 제1야당 후보가 모두 찬성하지만 이슈로 뜨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는 이 기사가 처음 반가웠지만, 이내 기대를 접었다. 이 문제는 여야, 좌우를 막론하고 갇혀있는 고질적인 진영논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정략적”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솜사탕처럼 녹아 버릴 이슈이기 때문이다.
임기 5년짜리 대통령에게 ‘제왕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준 것은 아마도 관료사회와 대기업들이 아닐까 싶다. 소송으로 상고심까지만 가도 5년이 훌쩍 넘어 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 ‘기업들의 법적(사회적이 아니라) 무책임’조차 거의 제어하지 못하는 국가의 지배구조를 방치하는 가운데 경제민주화를 논하고 있다.
누가 개헌을 반대할까?
기업들의 불법과 탈법, ‘무책임 경영’을 정치인들이 허용하고, 관료사회가 손을 맞잡고 협력하거나 사실상 방관하면서 한편으로 기업들에게 ‘자발적’인 사회적 책임을 되풀이해서 요청한다. 기업들은 지속가능보고서를 발간하고 적잖은 사회공헌 활동을 한다면서 부담주지 말라고 강변한다.
현 5년 단임제에서 대통령의 임기는 (좀 과장해서) 2년6개월에 불과하다. 어떤 개혁도 2년6개월에 불가능하다. 하지만 4년 중임 대통령의 임기는 8년으로 꽉 채울 수 있게 된다. 개혁을 포함한 국책과제가 안정적으로 추진되고 결실을 볼 수 있다.
ISO26000에 입각해 대선주자들에게 물어야 할 ‘조직 지배구조’ 관련 ‘사회책임’의 화두는 단연 개헌이어야 했다. 책임 있는 정치세력이라면 기업을 진정 지속가능하게, 사회 책임을 다 하게 하는 길이 국가권력에 의한 강압적 기업통제에 있지 않다는 점에는 모두 동의한다. 대신 기업이 관료사회와 정치권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끊고 자신들의 이해관계자(stakeholder)인 소비자와 종업원, 지역사회, 공급사슬(협력업체), 시민단체, 주주 등과 진솔한 소통을 하도록 여건을 마련해 줘야 한다.
효율 50%의 5년짜리 국가권력 임차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인데다 되레 이용만 당하기 십상이다. 진정 책임 있는 정치인이 개헌을 추진해도 왜 그것이 용두사미가 되는지, 누가 개헌을 가로 막고 있는지 눈여겨보면 알 수 있다.
한 대학교수는 개헌의 중요성을 거듭 역설하는 기자에게 핀잔을 섞어 말한다. “(MB정권의 실세인 모 의원을 지칭하며) 이 기자, 이모 의원하고 술 한 잔 했나보네?”라고.
관둡시다. 얘기 꺼낸 내가 미친놈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