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상익의 시선] 남과 비교해 열등감에 빠지기엔…”인생, 너무 짧고 소중해!”
고등학교 동기라고 하면서 나의 법률사무소를 찾아온 친구 부부가 있었다. 학교 시절 대화를 해본 기억이 없었다. 나를 찾아온 부부는 어딘가 삶이 추워 보이는 느낌이었다. 초췌한 표정으로 나의 사무실을 둘러보는 부인의 눈에서 묘한 빛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찾아온 친구가 말했다. “경기고등학교에서 다 서울대를 가는 데 나만 떨어진 것 같았어. 뭔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는 실패감 때문에 정착하지 못하고 인생을 방황했어. 서른아홉 살에 뒤늦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지. 트럭을 몰고 생수 배달을 시작했어. 그런데 늙어서 하니까 정말 힘든 거야. 물 두 통을 짊어지고 빌딩을 올라가려면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아. 일을 끝내고 저녁에 술 한잔 마시고 운전해 집으로 돌아오다가 단속에 걸려 면허가 취소됐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어.”
도와달라는 취지였다. 옆에 있던 그의 아내가 한마디 했다. “명문고등학교인 경기를 나왔다고 해서 저이와 결혼했는데 난 이게 뭐죠?” 그녀는 어떤 불공정함을 따지는 것 같았다.
어느 날 사무실로 다른 고교동기가 찾아왔다. 외판원이 되어 내게 물건을 팔러 온 것이다. 중고등학교시절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복한 집 외아들인 그는 운동도 싸움도 잘했다. 학교 시절 그는 재벌 아들의 눈에 들어 부하로 스카웃 된 셈이었다. 그 인연으로 그는 대기업에 취직이 되었다. 그러던 그가 외판원이 되어 내 사무실을 찾아왔다.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너 학교 때 싸움하고 무기정학을 받았잖아? 그리고 공부도 못했잖아? 서울대 가지도 못하고 말이야. 그런데 어떻게 고시에 합격하고 변호사가 될 수 있어? 고등학교 때 반에서 1등 하던 아이들만 법조인이 되던데 말이야.”
그의 말이 맞았다. 나는 그랬었다. 그가 순간 뭔가 생각하는 표정이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도대체 재벌아들인 그 친구와 내가 다른 게 뭐가 있어? 같이 놀았는데 왜 그 친구는 사장이 되고 나는 외판원으로 이렇게 살아야 하느냔 말이야.”
나는 금수저 출신과 그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는지 그에게 되묻고 싶었다.
그와는 달리 또 다른 재벌 회장의 아들을 왕같이 모시던 친구가 나의 사무실을 찾아왔던 적이 있다. 이런저런 얘기 끝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나를 포함해서 몇 명의 친구들이 평생 그 친구를 따라다니며 모셨지. 그런데 막상 얻은 게 없어.”
나는 그에게 또 되묻고 싶었다. 그 재벌의 아들이 왜 따라다니는 그들에게 주어야 하느냐고.
중고등학교 시절 모두 검정 교복에 까까머리를 했어도 나는 같지가 않다는 걸 일찍 깨달았다. 부자집 아들이나 천재적인 머리를 가진 아이는 나와 다른 족속이었다. 같이 싸움을 했어도 데모를 해도 권력가의 아들과 평민의 아들은 그 취급이 달랐다. 그게 세상이었다. 불공정함을 인정해야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비교적 일찍 배운 셈이다.
학교를 나와 내가 마주친 세상도 비슷했다. 권력가의 주변에 파리 떼같이 사람들이 모여드는 걸 봤다. 재벌 주변에도 학연 등을 이유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많이 봤다. 그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하기도 하고 친구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생각해 보았다. 꿀 한 방울에 모여드는 파리 떼를 동지라고 친구라고 할 수 있을까.
비교 경쟁에 인생을 바치기엔 삶이 너무 짧고 소중하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고 수용하려고 노력했다. 그게 나답게 사는 방법이라는 생각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선택해야 할 것이 있었다. 벌같이 집단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 나비같이 혼자서 날아다니는 걸 좋아할 수도 있다. 참새같이 떼를 지어 놀 수도 있다. 종달새같이 혼자 노래하면서 지낼 수도 있다.
나는 자유로운 생활과 글쓰기를 내 삶의 이정표로 삼기로 했다. 저마다 서 있는 자리에서 자기 자신답게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언제 어디서 어떤 형태로 살든 그 속에서 물이 흐르고 꽃이 피어나야 한다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