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희년’ 그리고 ‘경제의 선순환’ vs ‘탐욕의 악순환’

레위기 25장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그 땅에 있는 모든 주민을 위하여 자유를 공포하라 이 해는 너희에게 희년이니 너희는 각각 자기의 소유지로 돌아가며 각각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갈지며”(레 25:10)

희년은 공동체 모든 구성원의 빚이 50년마다 초기화되는 경제 제도입니다. 희년은 대속죄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대속죄일이란 지난 1년간 쌓였던 모든 죄가 해결되는 날입니다. 죄 사함을 받는 날로부터 빚 탕감의 해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빚 해결이라는 경제적 행위가 죄 사함의 은혜를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유의미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에도 이러한 희년 정신이 은유적으로 녹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 6:12) 이 구절을 원어의 뜻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우리에게 빚진 자의 빚을 해결해 준 것 같이, 우리의 빚을 해결해 주소서”가 됩니다. 죄와 빚이 각각 서로에게 메타포적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년을 선포하러 이 땅에 오셨습니다. 희년의 시행이 예수님의 사명이었습니다(눅 4:18-19). 대속죄일로부터 희년이 시작되었던 것처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인류에게는 희년이 도래했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시행하신 희년은 제도성을 띄지 않는다 것이 특징입니다.

한편으로, 빚은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가장 핵심 개념입니다. 빚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유지가 불가능합니다. 전체 통화량보다 대출액이 항상 많아야 유지되는 시스템이 자본주의입니다. 빚을 창출해야만 부가 창출됩니다. 경제성장률이라는 것도 빚이 늘어나는 속도를 의미하고, 경제의 선순환이라는 것도 부채가 계속 늘어나는 방향으로의 순환을 뜻합니다.

자본주의가 하나님이 주신 제도는 아닙니다. 돈에 집약된 인간의 탐욕이 제도적으로 구조화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인간스러운 제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한 이 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속될 것입니다. 경제의 선순환과 탐욕의 악순환은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반대 방향으로 계속 돌아갈 것입니다.

이러한 자본주의 시대 속에 희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허무맹랑한 이야기는 아닐까요? 어떤 이들은 공산주의 속에서 희년 구현의 희망을 기대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희년을 어설프게 흉내 낸 공산주의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진정한 희년은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의 방식 속에서 실현되는 것입니다. 1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받는 은혜를 경험해본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가 희년입니다. 자본주의 속에서 돈냄새를 호흡하며 사는 사람들이 처음 맡아보는 좋은 냄새, 그것이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청교도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그리고 막스 베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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