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길의 영화산책] ‘리스본행 야간대륙열차’
□ 야간 대륙열차
차가운 빗줄기. 스위스 베른 키르헨펠트 다리. 아래로 시퍼런 강물이 흐른다. 빨간 코트 여인이 다리 난간 위로 올라선다. “아, 뛰어내리겠구나.” 초로의 남자가 달려가 겨우 붙든다. 고등학교 고전문헌학 교사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자살의 순간을 수습한다. 빨간 코트 창백한 여인을 자신의 학교로 데려가 비를 긋게 해준다. 그리스어 수업 시간 여인은 교실에서 홀연히 사라진다. 그녀가 남긴 빨간 코트 속엔 책 한 권과 15분 후 출발 예정 리스본행 열차 티켓이 들어있다.
한때 제자였던 젊은 아내는 “남편의 삶이 너무 지루하다”고 불평했다. 아내와 이혼한 57세의 남자. 그리스어 라틴어 헤브라이어를 자유자재로 해독하는 언어학자 중년남. 고전강독 수업, 혼자 책읽기, 체스가 삶의 전부다.
이런 남자의 가슴이 갑자기 뛰기 시작한다. 그녀를 만나 코트를 건네줄 요량으로 기차역까지 달렸다. 둘러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으니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학생들과 베른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상.
하지만 플랫폼의 그레고리우스는 서서히 출발하는 기차를 가만히 지켜보다 훌쩍 열차에 올라탄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생(生)의 에너지가 꿈틀거렸을까. 포르투갈어로 씌어진 <언어의 연금술사>. 이 작은 책에 흠뻑 빠진다. 책의 저자는 젊은 의사 아마데우 프라두(잭 휴스턴).
남유럽을 관통하는 열차는 스위스 프랑스 스페인을 거쳐 포르투갈 리스본에 안착한다. 중세 유럽의 본질과 정취가 가득한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은 골목골목 트램이 삶의 생태계를 그려준다. 그레고리우스는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아간다. 오빠 아마데우가 살아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여동생을 만나 비극의 단초를 듣고 요절한 아마데우의 묘지를 찾아간다.
이제부터 관객은 그레고리우스의 발길과 동행하며 한때 전 유럽을 호령했고 지구촌 최초의 ‘지리상의 발견’을 이끌었던 포르투갈을 경험한다. 그 핵심공간 리스본의 풍광을 맛본다.
그레고리우스의 여정을 통해 1970년대 혁명 태동 폭풍전야로 시간이동 한다. 1974년 포르투갈 독재정권에 맞선 좌파 청년장교 주도 무혈쿠데타인 ‘카네이션혁명’ 직전. 리스본의 골목은 독재 타도의 열기로 가득 찼다. 동시에 독재의 앞잡이와 끄나풀은 반독재 청년 지식인들을 대대적으로 색출한다. (왜이리 대한민국 80년대 대학시절과 닮았는지, 혁명을 꿈꾸던 신촌시절 데칼코마니.)
판사 집안 귀족출신 의사 아마데우와 노동자 계급 출신 약사 조지는 둘도 없는 동기동창이었다. 두 사람의 우정은 혁명거사를 도모하던 중 치명적 매력을 지닌 스테파니아를 사이에 두고 어그러지고 만다. 조지는 스테파니아에 집착했고 스테파니아는 아마데우에게 빠져들었다. 아마데우는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휘청거렸다. 혁명-질투-배신이 얽히고 맞물렸다.
□ 내 청춘의 노트
아마데우 요절 이후 여동생은 오빠의 청춘 노트들을 엮어 책으로 발간했는데 100권만 인쇄했다. 그 중의 한 권이 수십년 후 스위스 베른의 그레고리우스의 손에 들어온 것이다. 의사였지만 작가를 꿈꿨던 아마데우.
젊은 영혼의 기록 <언어의 연금술사>를 통독하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차례차례 관련 인물들을 찾아가 퍼즐 맞추듯 포르투갈 혁명의 한 시대 ‘청춘의 초상’을 완성시킨다.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를 추적하며 자기 자신을 찾고 싶었다. 자신도 한때 청춘열차 궤도의 열정이었다.
그레고리우스의 여정과 1974년 포르투갈 카네이션 혁명에 휘말린 청춘들의 과거가 교차 편집되면서 진실의 열정이 모습을 드러낸다. 열정 앞에 정답은 없다.
“꼭 요란한 사건만이 인생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되는 건 아니다. 실제로 운명이 결정되는 드라마틱한 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소할 수 있다”(<언어의 연금술사> 중에서)
길을 걷다가 자전거와 세게 부딪친다. 이것조차 운명이었을까. 새로운 만남이 다시 시작된다. 언어학자 두꺼운 안경은 산산이 부서진다. 근처 안과를 찾은 그레고리우스에게 친절하게 시력 상담을 해준 독신 여의사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 스위스 늙은 남자의 낯선 리스본의 여정을 귀담아 경청해준다.
찬찬히 스토리를 들었다. 그의 안경을 바꿔준 마리아나는 책의 저자 아마데우 프라두의 옛 친구였던 자신의 외삼촌을 소개한다. 그 시절 서로 혁명 동지였던 것이다.
영화는 그레고리우스가 마치 사립탐정처럼 책에 얽힌 사연을 추적해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깨진 안경을 바꾸고 새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그레고리우스의 삶은 리스본에 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우린 우리 일부를 남기고 떠난다. 그저 공간을 떠날 뿐. 떠나더라도 우린 그곳에 남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야만 찾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 안에 남는다. 우리가 지나온 생의 특정한 장소로 갈 때 우리 자신을 향한 여행도 시작된다. 그 여정의 길이는 중요하지 않다.”(<언어의 연금술사> 중에서)
□ 머무를 때, 떠날 때
그레고리우스
“5분정도 남았군요. 내가 지루하지 않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생각해보면 아마데우와 스테파니아, 그들 인생에는 활력과 강렬함이 가득했던 것 같아요.”
마리아나
“너무 강렬해서 결국 부서졌잖아요.”
그레고리우스
“하지만 충만한 삶이었죠. 내 인생은 뭐죠? 지난 며칠을 제외하고요.”
마리아나
“그런데도 다시 돌아가려 하시는군요. 여기 머무시는 건 어때요?”
그레고리우스
“뭐라고요?”
마리아나
“여기 계시면 안되나요?”
뜻밖의 여행길. 마리아나는 베른으로 돌아가려는 그레고리우스에게 묻는다. 평범한 일상과 새로운 만남 사이에서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는 그레고리우스. 플랫폼에 선 두 사람이 한 장의 사진으로 찰칵! 남는다
□ 청춘의 문장
아마데우의 책 <언어의 연금술사> 문장이 곳곳에 잠언처럼 인용되어 영화는 마치 한 권의 책읽기다. 관객을 철학적 사유로 안내하는 대사들과 내레이션은 탄탄하다. 한때 훤칠하고 멋졌던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수상자 제레미 아이언스. 후줄근한 바지와 모직 자켓, 도수 높은 안경, 빗겨 넘긴 반백의 머리와 어눌한 목소리의 평범한 노신사가 되어 스크린 속으로 녹아들었다.
파스칼 메르시어가 쓴 동명 소설이 원작. 한 중년 남자의 생의 전환을 탁월하게 그렸다고 유럽문단은 환호했다. 매혹적인 문체와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고찰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은 원작은 독일에서만 200만부가 팔렸고 전 세계 30개국에서 출간됐다.
남자의 여행은 남자의 삶 자체를 구원할 수도 있다. 역시 글과 문장은 문체다. 편안한 문체? 날카로운 문체? 생을 정리하는 문체? 느긋한 문체?
오늘 하루를 문체로 여미고 있다. 나는 무슨 문체로 무슨 문장으로 삶을 기록하고 있나. 주어와 서술어 스토리텔링 궁리질한다. 말은 휘발되지만 글은 정연하게 남아있다. 사는 동안 무얼 남기는가.
타이틀 = 리스본행 야간열차 (Night Train to Lisbon) 2013
감독 = 빌 어거스트
출연 = 제레미 아이언스, 멜라니 로랑, 잭 휴스턴, 마르티나 게덱
제작국가 = 독일, 스위스, 포르투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