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류:시가 있는 풍경] ‘비(悲)’…갑진년 한해 품어갈 한 글자

2023년 2월 여류 이병철 시인이 촬영한 통도사 자장매

2024년 갑진년 새해 첫 아침입니다.
옹근히 새로운 한해, 그 눈부신 새 아침입니다.
이 아침, 한 해를 보내고 다시 새해를 맞이하면서 이렇게 지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또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이 이번 생에서 얼마나 고맙고 대단한 것인지를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내가 만났던 인연들, 그 다정했던 눈빛과 따뜻했던 손길들을 생각합니다. 가고 머문 곳에서 만났던 여러 풍경과 거기에 깃들어 숨 쉬던 생명붙이들과 존재들도 떠오릅니다.

통도사 매화

모두에게 고맙습니다. 그 인연, 그 덕분으로 다시 새해를 맞을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동시에 지난 일년 동안 내 곁에서, 그리고 이 지구촌 곳곳에서 아파하다가 사라져간 사람들, 죽임당한 숱한 존재들을 생각합니다. 지구 행성이 태양을 한 바퀴 순환하는 그 시간에 이 땅에서, 이 행성에서 일어났던 아픔과 불행들을 기억합니다. 그 아픔과 비명과 애절한 눈빛이 내게도 아릿한 통증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것이 또한 나하고도 이어져 있음이 느껴집니다.

이 때문일까요. 새해, 이 우주에서 새롭게 열리는 2024년, 이 한 해를 품어갈 한 글자를 생각하다가 먼저 떠오른 글자는 ‘비(悲)’였습니다. 자비(慈悲)라고 할 때의 그 ‘비(悲)’입니다.

비(悲)의 자전적 뜻은 ‘슬프다, 서럽다. 슬퍼하다, 마음을 아파하다. 슬픔, 비애, 자비’ 등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만 내게는 ‘자식의 고통 그 아픔을 온몸으로 품고 있는 어미의 마음’으로 다가와 있습니다.

이는 불교의 주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라고 하는 ‘모든 중생(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에게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과 미혹을 없애주는 한없는 네 가지 마음’이라는 사무량심(四無量心)인 자(慈), 비(悲), 희(喜), 사(捨)의 네 가지 무량심 가운데 비무량심(悲無量心)의 의미를 담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흔히 자무량심(慈無量心)을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즐거움을 베풀어 주는 마음가짐이라고 한다면 비무량심(悲無量心)은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괴로움(고통)을 덜어주려는 마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함께 아파하는 마음, 그 아픔을 서로 품고 보듬는 마음으로 새겼으면 합니다.

통도사 매화

지구 생명계의 대멸종과 무너져내리는 인류문명의 종말적 상황 속에서 가장 우선하는 일은 먼저 서로의 아픔, 그 고통과 두려움을 함께 품는 것이라 싶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비(悲)’는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이라는 ‘연민(憐憫)’ 뜻과 같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함께 아파하기, 그 아픔으로 서로를 품어 안을 때 그 온기로 인류문명의 혹한기를 견뎌내고 새봄을 열어갈 수 있으리라 싶습니다. 그것이 내게는 마지막 희망이기도 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비(悲)’를 새해를 품어갈 한 글자로 새기면서 이 ‘비(悲)’라는 글자 속에 담겨 있는 ‘자(慈)’를 함께 봅니다. 자비(慈悲), ‘자(慈)’와 ‘비(悲)’는 따로 떨어져 있을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함께 아파하며 품는 마음이 곧 자비이며, 그것이 자식을 낳고 기르며 함께 아파하며 품어 안는 어머니 사랑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자(慈)’를 ‘어머니 사랑’이라고 새기는 것도 이런 까닭이기도 합니다.

새해는 함께 아파하면서도 또 환하게 미소 지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픔을 함께하면서 그러나 누군가도 아프게 하지 않는 그런 한해, 새해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당신이 일구는 새해, 가고 머무는 곳마다 아픔을 넘어 환한 기쁨이 열리는 그런 나날 되시기를, 그 길에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도 깊은 평화가 가득하시길 마음 모읍니다.

지난 한 해의 은혜에 감사드리며 새해에도 감사와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갑진년 정월 초하루, 첫 아침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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