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칼럼] 백수 유감(有感), 그리고 무위당 장일순

장일순 선생 대형 사진 옆에 서있는 필자 이병철 시인

스승 무위당 10주기(2004년) 때, 원주 소초면 수암리 묘소에서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라는 시를 읽었다. 내 나름으로 스승의 10주기에 올리는 헌시(獻詩)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뒤에 “백수의 꿈”이라는 시를 썼다.

헌시에서는 백수였던 스승을 닮아 나도 스승처럼 처음부터 백수이다.라는 자랑스러운(?) 고백을, 시 ‘백수의 꿈’에선 “마침내 백수가 세상을 구하리라”고 하는 선언(?)을 했다.

나는 농민운동 조직의 실무자로 일하던 한때를 제외하면 평생(?)을 백수로 살아왔다. 생의 마지막까지 그럴 것이라 싶다.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직업이라는 점에서 보면 운동조직의 실무자로 일할 때도 백수라 해도 크게 무리하지 않을 것이다. 당시는 그런 일(?)만 하는 이들이 매우 드물었고, 더구나 생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아내 정원님이 나 대신 생계와 집안 살림을 책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미안했지만 그런 덕분에 여태까지 40년이 훨씬 넘도록 이른바 사회운동판의 백수로 지내오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그 판에서도 실속을 챙기며 제법 먹고사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하는데 세상이 많이 달라지기는 한 모양이다. 이른바 운동권 인사, 민주인사라며 정치에 진출하기도 하고 행세하는 이들이 그런 부류라고 하겠다.

아무튼 나는 그런 자들과 무관한 백수로 여태 살아왔는데, 근래에 직업란에 백수(무직) 대신에 쓸 수 있는 직종이 하나 생겼다. 시인이라는 게 그것이다. 시인이 직업으로 분류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시인이 된 것은 운동권의 거칠어진 언어와 사고를 좀 순화하고자 시를 쓰게 되고 그렇게 낸 시집이 또 나의 의도와 달리 제법 이름있는 문학상의 수상작으로 선정되어 매스컴에서 내 이름에 시인이라는 직함을 붙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졸지에 시인이 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백수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실 상금으로 내 생애에 가장 큰돈을 받긴 했고 어쩌다가 원고료라고 약간의 돈을 몇 번인가 받은 적이 있긴 하지만 그것이 거의 전부다.

그렇게 백수 시인으로 지내오고 있는데, 이태 전에 어떤 행사를 치르면서 주최측에서 내 직함을 생명운동가로 써놓았다. 내가 그동안 농민운동, 환경운동, 귀농운동, 생명평화운동 등의 이름으로 일해오면서도 내가 생명운동가로 소개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래서 요즘은 스스로를 생명운동가라고 소개하기도 하는데, 나는 근세 한국 생명운동의 효시로 해월에서부터 그 맥을 이어 무위당, 노겸, 인농 등의 선배들을 뒤따르고 있다고 자위한다.

그리고 최근에 또 하나의 직함이 생겼는데, 그것은 “스마트폰 사진가”라는 새로운 직함이다. 아마도 이런 직함도 있는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사연은 이렇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스마트폰으로 사진 찍기를 좋아하는 이들이 많이 생겼는데, 나도 그중에 하나다. 지금은 내가 가장 즐기는 취미가 되었다. 그래서 지지난해에 스마트폰으로 연꽃의 여름 한철 사진을 찍고 그날그날 연꽃을 만나고 온 소감을 일지 형태로 썼는데, 그걸 묶어 <애련일지>(愛蓮日誌)라는 제목의 사진 산문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아마도 여름 한철 연꽃의 자태만을 이렇게 묶어낸 책은 처음이 아닌가 싶다.

내 책과 사진을 본 오랜 기자 출신의 한 아우가 “앞으로 형님 직함을 ‘스마트폰 사진가’로 하시라”고 해서 졸지에 그렇게 되었는데, 아무튼 이를 계기로 몇 개의 인터넷 신문에 스마트폰 사진과 글들을 게재하고 있다. 거기엔 내 소개를 시인, 스마트폰 사진가, 생명운동가 등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근에 은퇴한 세대들이 부쩍 늘어나면서 이 사람들이 자기들을 백수라고 소개하는 경우가 많다. 백수의 처지에서 보면 이는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백수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의 경우는 ‘은퇴자(retiree)’라는 공식 용어가 따로 있다. 직업란에 무직(백수)이 아닌 따로 표시된 직군(職群)이다.

은퇴자는 백수의 삶이 아닌 은퇴자의 삶을 즐겨야 한다. 묶였다가 풀려났으나 이제는 쉼의 여유를 즐기는 것이 그것이다. 백수는 애초부터 묶이기를 거부하거나 묶을 수 없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백수는 기본적으로 순수성과 자발성이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백수 자체가 중요한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

내가 백수가 세상을 바꾼다고 한 의미는 이 때문이다. 그는 생계가 우선이 아니라 묶이지 않는 삶 자체가 우선인 까닭에 자본주의의 덫인 돈 즉 경제가치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세상, 자본주의 그 너머를 꿈꿀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수는 물질적 풍요가 아니라 삶의 여유, 영혼의 자유를 꿈꾸는 존재라 할 수 있다.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고 내가 고백한 것도 이런 의미이다.

백수로서의 내 바람 가운데 하나는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자발적 백수가 되어 생명운동가의 길에 뛰어드는 것이다. 그러면 꿈꾸는 세상이 더욱 빨리 다가오지 않겠는가.

그러나 백수에겐 피할 수 없는 아픔이 있다. 그런 한 사람의 백수를 위해 여러 사람이 삶을 저당 잡힐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함께하는 이들과 세상에 대한 그 미안함과 고마움을 품고 그런 아픔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 그것이 백수가 꿈꾸는 세상이다.

시 ‘백수의 꿈’은 이번 생의 존경하는 도반, 도법스님이 법문으로 이 시를 낭송한 것이 유튜브에도 소개되어 있으니 도법스님의 낭랑한 목소리를 통해 들어보시면 좋겠다.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
처음 스승을 만났을 때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스승은 그렇게 백수로 사셨다.
백수로 사셨기에 만날 사람 자유로이 만나셨고
백수였기에 우리 또한 자유롭게 뵐 수 있었다.

생계를 위한 돈벌이를 갖지 않았으니
당신의 삶을 저당 잡히지 않으셨고
밥을 사고팔지 않으심으로 밥 속에 든 하늘을 보셨다.

백수였기에 얽매이지 않으셨고
백수였기에 하는 일 없이 하실 수 있었다.
무엇을 이루려 하지 않음으로써
절로 이루어짐을 즐겼다.

스승은 백수였기에 정신없이 달리지 않을 수 있었고
느릿느릿 걸으시거나 멈춰 서서
나무도 보고 풀꽃도 만나며
사람과 세상을 깊이 보듬어 안으면서
땅과 하늘을 함께 바라볼 수 있었다.

스승은 백수였기에 가진 것이 없었고
가진 것이 없어서 더욱 풍요로울 수 있었다.
자동차가 없어 걸어 다니는 수고는 하였으되
자동차에게 소유당하는 수모는 겪지 않으셨다.

백수였기에 깊은 산골에 핀 난초의 향기로움을
저잣거리 한가운데서도 나눌 수 있었다.
백수였기에 멈춘 자리에서 우뚝한 나무가 되셨고
백수였기에 걸림 없는 바람이 될 수 있었다.

나의 스승은 백수였다.
스승의 스승 또한 백수였었다.
스승을 닮아 살고자 하는 나 또한
다행히 처음부터 백수이다.

2004년 5월 22일
선생님 10주기에

다음은 도법스님의 ‘백수의 꿈’ 낭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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