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왜 용서가 안될까?

“내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용서하고는 내가 베푼 용서를 잊은 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얼만큼 용서를 베풀었는지 기억하다보면 교만해질 게 뻔하니까 말입니다.”(본문 중에서) 사진은 이집트의 총리가 된 요셉이 자신을 팔아넘긴 형들을 용서하는 장면.


마태복음 18장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경우가 있고 다른 의도가 있어서 물어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담배 피면 하나님께서 싫어하실까요?”, “그리스도인이 술 마시면 안되나요?” 이런 질문은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 듣고 싶은 대답이 있어서 질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몇 번이나 용서하면 되겠습니까? 일곱 번이면 되겠습니까?” 베드로는 횟수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아닙니다. “그 정도 하면 됐다. 할 만큼 했다.” 이 대답이 듣고 싶었던 것입니다.

혹시 일곱 번이나 용서해야 할 상황을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일곱 번 용서해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내가 앞서 베푼 여섯 번의 용서가 상대에 의해 깡그리 무시당한 경우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를 또 다시 용서한다는 것은 나를 호구로 봐달라는 것 아닐까요? 용서, 일곱 번만 해도 할만큼 했다 여겨질 정도로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살면서 내가 받은 용서가 몇 번일까 생각해보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나는 일곱 번씩 일흔 번만 용서 받았을까요? 용서하는 것이 힘든 이유는 내가 얼마나 많은 배려와 인내와 용서 속에 살아왔는지가 기억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보고 내가 만 달란트를 탕감받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 우리의 실상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약 1,000만원이고 만 달란트는 약 30조원입니다.

되지도 않는 용서를 해보려고 열심을 내다 보면 용서하는 척하는 위선자가 되기 쉽상입니다.

그저 내가 받은 용서를 기억하고 또 기억하다가 어느새 나도 모르게 누군가를 용서하고는 내가 베푼 용서를 잊은 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내가 얼만큼 용서를 베풀었는지 기억하다보면 교만해질 게 뻔하니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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