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십자가 앞에서 예수를 버리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마태복음 26장

“이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마 26:56)

3년 동안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양육을 받은 제자들 중에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3년 제자 양육의 열매는 제자에 의해 팔리고, 제자에 의해 버려지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이르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하고 모든 제자도 그와 같이 말하니라”(마 26:35)

분명히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집과 가족을 버리고 자신이 하던 일까지 접고 예수님을 따라왔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인생 전부를 걸었습니다. 아마 스스로도 몰랐을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갈 줄은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 올인 했던 그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배신할 수 있었을까요? 십자가는 본인들이 기대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내 인생을 바친 주님이 그런 결말을 맞이하게 되시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기 시작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계산 속에 없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겠다며, 은혜 받았다며, 내 인생 주님께 맡긴다며 신앙의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주 인도 따라 살아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 이런 고백의 찬양은 수십 수백번도 더 드렸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인생에 적어도 한 번은 십자가와 같은 사건을 경험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빗나가는 상황에 내던져지는 경험 말입니다.

역설적이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렸기 때문에 예수님을 진정으로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며 자아의 죽음을 경험했습니다. 만약 베드로 자신이 호언장담한대로 예수님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면 그는 예수님을 전하기보다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충성심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요?

자기 부인이란 나 스스로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자기를 부인하는 일에 성공했다면, 자기부인에 성공한 자아는 여전히 부인되지 않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며 자기부인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 이것이 십자가 아래에서 경험하는 역설입니다.

내가 따르겠다고 마음 먹어서 따라가는 예수님은 예수님이 아니라 내 욕심의 종교적 투사체일 수 있습니다. 십자가란 그 투사체가 실체가 아니라 허상이라는 것이 탄로나는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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