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깐묵상] 징조와 예표가 되는 삶
이사야 20장
“그때에 여호와께서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갈지어다 네 허리에서 베를 끄르고 네 발에서 신을 벗을지니라 하시매 그가 그대로 하여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니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종 이사야가 삼 년 동안 벗은 몸과 벗은 발로 다니며 애굽과 구스에 대하여 징조와 예표가 되었느니라”(이사야 20:2-3)
구약의 선지자들을 보면 언어적 메시지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비언어적 메시지도 함께 전했습니다. 특정한 행동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입니다. ‘백문이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 행동으로 한 번 전하는 메시지가 말로 백 번 전하는 메시지보다 훨씬 실감이 나고, 사람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설교나, 기독교 변증, 성경에 대한 해설이 오늘날처럼 넘쳐나는 시대는 과거에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평생을 보고 듣고 읽어도 남을 만큼의 영상물이나 서적이 존재합니다. 이렇게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복음에 대해서 백 번도 넘게 말하는데 세상이 듣지 않는 것은 제대로 보여주는 한 번이 없었기 때문 아닐까요?
기독교를 대표하는 상징물은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설명이나 변증거리이기 전에 예표입니다. 들려주기 전에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별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십자가가 어떤 의미인지 설명하거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말로 설득하려 하지 않으시고 처음부터 끝까지 침묵하셨습니다. 그저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를 지는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십자가를 설명하는 일이기 전에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전하는 일이 말로 해서 될 일이었으면, 글로 써서 될 일이었으면 이미 다 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세대를 향해, 가족들을 향해 설명과 설득만 하다가 그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이 부르신 제자들은 말과 글에 서툰 사람들이었습니다. 보여주고 살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별로 없는 사람들을 예수님이 부르신 것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란 설명 가득한 쪽지를 뿌려대는 것이기보다 변명 없이 묵묵히 살아내는 삶의 한 절 아닐까요?